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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폭풍 이전: 소련-일본 40년 관계사 (中) 8월의 폭풍

3. 본격적인 소일 충돌, 1931-1939


관동군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전체를 장악하고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천군벌보다 훨씬 확실한 완충지대인 만주국을 만들고, “가지지 못한 나라” 일본을 “가진 나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자원지대를 손에 넣었습니다. 이는 일제 15년 폭주의 시작이었습니다.



봉천에 입성하는 일본군




그런데 소련은 여기에 유화책으로 대응했습니다. 흔히들 스탈린을 세계적화에 광분하는 독재자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세계혁명의 배신자라고 욕을 할 정도로 현행 국제질서의 유지를 중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스탈린 외교의 특징인 서방 강대국과의 정면충돌은 최대한 피한다는 기조는 일본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국제연맹의 여러 국가들이 만주국을 불승인했지만, 소련은 만주국을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승인하지도 않았습니다. de fecto, 즉 사실상 국가로 인정을 해 버리고 문제를 방치한 거죠. 그리고 1935년에는 문제의 중동로 철도를 일본에 매각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때문에 장제스가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하는데 스탈린은 알 바가 아니었죠. 최신 연구에 의하면 중동로 철도 매각이 그저 일본이 하도 남만주에 철도를 많이 건설하다 보니 사업성이 떨어져서 매각한 거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일유화책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37년의 고려인 대이주도 연해주에서 일본과의 충돌요소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대일 유화책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동군과 일본 정부는 소련의 유화책을 아예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소련이 관동군의 무력증강에 대비하여 극동 국경에 병력을 증강하는 것만 부각하며 소련의 유화적인 신호는 전부 기만에 불과하니 무력증강만이 답이라고 주장하며 관동군 세력확대의 기반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수십 번의 소규모 국경침범을 하며 소련을 계속 도발하였습니다.


게다가 1936년, 일본은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방공협정을 맺어 버립니다. 일본 내 파시즘에 대한 우호적 시선과 히틀러가 떠드는 “유대-볼셰비즘 절멸”에 강한 매혹을 느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공협정을 통해 일본은 대소적대시정책을 사실상 노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대환장 콜라보



중일전쟁도 긴장된 소일관계를 반영하였습니다. 노구교 사건이 터졌을 때, 일본 군부는 중국의 배후에 소련이 있으며 노구교 사건은 소련의 사주로 발생한 일이라도 단정지었습니다. 그런데 진상조사를 해 보니 소련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게 드러났지요. 하지만 중국 화북지방을 선제적으로 점령하여 더 거대한 완충지대를 만들어 소련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견해가 더욱 부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화가 난 데다가 중화민국이 무너지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소련이 Z작전을 통해 중화민국에 군수물자와 군사고문단, 전투기 조종사를 파견해 지원하자 일본은 이를 맹비난하고 중국 뒤에 소련이 있음이 확실하다고 보며 긴장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긴장격화 와중에 결국 소련과 일본은 대규모 무력충돌을 벌이게 되는데 1938년의 하산 호수 전투가 그랬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의 극동지구위원장인 류시코프란 놈이 숙청을 피해 국경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고위급 인사가 도망갔으니 자연히 소련이 소만 및 한소 국경지대를 강화하며 소련군과 일본군의 대치 수위가 한층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하산 호수 인근 장고봉에 1개 분대 규모의 소련군이 소규모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여기가 함경도 국경지대였기 때문에 담당 관할인 조선군 사령부는 별거 아니니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대본영에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관동군이 갑자기 끼어들었습니다. 관동군은 장고봉 일대가 자기네들 관할구역도 아닌데도 이번 기회에 소련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며 무력대응을 주장했습니다. 대본영은 관동군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일본군이 몰려오니 결국 서로 왜 국경침범 하냐고 아웅다웅하다 총격전이 벌어지고, 일본군이 장고봉을 점령하며 사태는 결국 사단급 수준의 대규모 충돌로 확대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산 호 전투는 결국 계속되는 긴장격화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긴 영국의 중재로 결국 일본이 먼저 물러나며 소련이 다시 장고봉을 가져가는 쪽으로 종결되었습니다.




하산 호 전투 지도



그런데 일본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소련군을 더욱 얕잡아보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소련군의 세 차례에 이르는 공세를 막아냈습니다. 게다가 이 전투에서 보여준 소련군의 모습은 흔히 서구 세계에서 소련군에 가진 편견인, 인명을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적 진지에 인해전술로만 몰아붙이는 무식한 군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분쟁이 종결될 때까지 소련군은 장고봉을 탈환하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간과한 사실은, 소련군이 한 번만 더 장고봉을 공격했다면 장고봉을 뺏길 수 있을 거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관동군은 그 점은 무시하고 더 큰 도발을 1939년에 감행하고 말았습니다.


만주와 몽골의 국경은 소련과 일본의 분쟁지대였습니다. 일본이 국경을 할흐 강으로 규정하자고 한 반면, 소련은 할흐 강보다 더 동쪽으로 30km 떨어진 노몬한 마을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양측이 계속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몽골 기병대가 분쟁지역에 진입했습니다. 몽골 기병대는 인근에 진입한 만주국군 기병대와 산발적 충돌을 벌였고, 몽골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일본 수색대가 분쟁지역에 진입하여 몽골군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이 수색대는 소련군과 몽골군에 포위당해 섬멸당해 버리며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관동군 사령부는 더 강력한 무력대응을 결정하며 2개 사단을 투입해 공세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관동군의 공세는 소련군에게 막혔고, 1939년 8월에 이르면 결국 주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에게 2개 사단의 대부분이 포위당해 버리는 참패를 겪게 됩니다.



지도를 보면 2개 사단이 포위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투에서 무참히 패했고 소련군의 강력함을 보았지만, 당시의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과 관동군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압박하여 할힌골 전투의 승패와 관계없이 일본을 도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된 겁니다.



스탈린은 이 협정을 맺으며 "오늘부터 나도 반공주의자요."라는 개드립을 쳤습니다;;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을 거라고 일본에 알려주지도 않았고 암시도 주지 않았으며, 일본 외무성과 정보기관들은 불가침조약 움직임을 아예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독일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된 겁니다.


히라누마 수상은 이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구주천지 복잡기괴”

(청중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즉, 유럽 정세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볼셰비즘 절멸한다는 나치가 소련과 협정을 맺어요!


결국 도고 시게노리 주소 일본대사를 대표로 한 일본 대표단은 소련에 내내 저자세로 나와서 소련측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결국 일본은 소련이 주장하는 데로 국경선을 확정지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소련도 일본의 체면을 살려주느라고, 중화민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최소화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째 소련과 일본의 관계에서 중화민국은 항상 피해자예요. (청중들: ㅋㅋㅋㅋㅋㅋ)


이후 일본에서는 육군 내부에서 이제 독이일소 사국동맹 시대를 대비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부르짓던 “유대-볼셰비즘 절멸”은 그런 건 그저 내부결집을 위한 레토릭에 불구하고 독일과 소련의 관계도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 그냥 현실 국가관계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유대-볼셰비즘 절멸하자는 나치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어 버리니 그럴 수 밖에요. 그 때문에 추후 소련과 재차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나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일본은 남방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4. 기묘한 중립, 1941-1945


1941년이 되자 소련은 나치 독일이 예상 못한 전유럽 석권에 성공하며 나치와의 전쟁이 훗날이라도 불가피함을 느꼈습니다. 프랑스가 그렇게 빨리 무너질 줄은 소련도 몰랐던 겁니다. 그에 따라 소련은 후방인 극동의 안전을 도모하고 싶어 했습니다. 일본 또한 남방으로 눈을 돌리며 영국과 미국과의 갈등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역시 후방인 극동의 안전을 도모하고 싶었습니다. 그에 따라 소련과 일본은 서로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이 4월에 모스크바로 날아가서 스탈린과 불가침조약 협정을 치릅니다. 불가침조약의 핵심 문구는 조약 당사국은 제3국이 서로의 나라를 침공할 시 중립을 준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불가침조약 협정에 서명하는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



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마쓰오카 외상이 스탈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일본인은 사실 도의적 공산주의자입니다.”

(청중들: ???????)


이는 일본의 천황제 집단주의와 소련의 스탈린주의 집단주의가 일맥상통한는 것이 있다는 견해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청중들: 아. ㅋㅋㅋㅋ)


그 말에 스탈린은 이렇게 회답했다고 합니다.


“나도 당신도 다 같은 아시아인이오.”

(청중들: 아 조지아 ㅋㅋㅋㅋㅋ)


그렇습니다. 이는 스탈린의 출신이 그루지야인 데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당대 그루지야를 비롯한 캅카스 지방은 서유럽 세계에서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협정 끝내고 팔짱 끼고 기념촬영



그런데 6월 22일, 나치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습니다. 나치 독일은 침공 전부터 일본에 대소전이 시작되면 소련을 공격하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일본은 이 때문에 나치가 대체 뭐하자는 건지 몰라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아무튼 독일이 소련과 전쟁한다고 하니 다시 소련과 싸우자는 북진론이 육군에서 대두되었습니다. 관동군은 12개 사단을 동원한 “관동군 특종연습”이란 대규모 기동훈련을 개시하여 다시 긴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독일에 대한 불신이 이미 강해졌습니다. "유대 볼셰비즘 절멸"을 내세운 독일을 믿고 소련을 침공했다가 독소 불가침조약처럼 히틀러가 원하는 것만 얻고 전쟁에서 빠지면 버리면 일본은 그냥 바보가 되어 버릴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소련이 독일을 상대로 1년 이상 버틸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일본 정부는 결국 불가침조약의 준수를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흔히들 유명한 소련 스파이인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이 불가침조약을 준수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스탈린이 극동 병력을 모스크바 전투에 투입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런데 글랜츠 박사님의 2017년에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그게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은 조르게 보고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극동에서 병력이동을 결정했던 겁니다. 조르게의 보고는 스탈린을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었지만, 스탈린은 조르게 보고 전부터 일본이 침공하더라도 모스크바를 잃느니 연해주를 잃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소련과 일본은 상대는 분명 아군의 적인데 자신의 적은 아닌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양측은 불가침조약을 철저히 준수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였나면, 일본은 소련 블라디보스톡으로 물자를 수송하던 미국 수송선을 격침했을 때 소련의 항의를 받자 다시는 극동항로만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관동군과 극동 소련군 모두 서로 도발을 극도로 자제했습니다. 한 미국 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기묘한 중립”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과 일본은 내내 서로를 답답하게 여겼습니다. 나치 독일은 일본에 소련을 공격해 달라고 계속 부탁했지만, 일본은 독일에 유대 볼셰비즘은 어차피 레토릭이고 땅 뜯으면 전쟁 끝낼 거 다 아니 그냥 영미와 더 싸워달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독일과 1943년 하리코프 전투 이후에는 독일과 소련 사이를 중재하려고까지 해서 독일을 짜증 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간극은 독일이 망할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청중 한명: 목표가 일치하지 않는 조별과제 ㅋㅋㅋㅋ)


한편 미국도 여러 차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요청했는데 소련은 내 코가 석자라며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실제 첫 참전 요청이 1941년 12월이었는데 이때는 소련이 모스크바가 간당간당한 상황이어서 대일전 참전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아무튼 소련은 대일전에 때 되면 참전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미국도 소련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으니 일본과 독일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겠군요.


덧글

  • 함부르거 2019/08/27 14:56 # 답글

    >> 목표가 일치하지 않는 조별과제

    이거 아주 정확한 레토릭인데요. 같은 조인데 서로 다른 주제로 리포트 쓰고 있는 격.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PKKA 2019/08/28 09:43 #

    이 말씀을 하신 청중은 연성재거사님이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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