РККА Ставка 이글루스 지부

PKKA1918.egloos.com

포토로그



군사사에서의 소련군: 편견의 기원부터 극복까지 (편집,보완판) 군사학 잡설

* 본문은 지난 2월 역밸 모임에서 발표한 원고를 참고문헌 하나 더 추가해서 편집, 보완한 것입니다. 발표 이후 원고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바쁜 시기에 논쟁적인 소재를 너무 선정적이고 비교적 조잡하게 다뤄서 구설수에 올라 그것에 신경을 써서 시간을 뺏기지 않을까 우려를 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원고 자체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작은 사이트에만 올렸습니다. 하지만 근래 로널드 스멜저와 에드워드 데이비스의 연구서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Popular Culture를 읽고 나니 이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고 그 뿌리가 대중들 사이에 너무 깊게 뿌리밖혀 있다는 점에서 이런 조잡한 글이라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을 까 해서 공개를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편집 전의 원고가 아닌 편집판으로 올리는 이유는 편집 전 원고에 추가해야 할 짤방이 좀 많아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입니다.


서문


추레한 복장의 병사들이 기차를 타고 강 근처의 역에 도착한다. 흡사 가축이라도 수송하는 것처럼 짚이 깔린 화물수송칸에 빽빽히 들어차서. 병사들이 도착한 곳은 전장이고 이들은 곧장 전장에 투입된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총은 얼마 주어지지 않는다. 돌아오는 말은 총이 없는 병사는 쓰러진 전우의 총을 잡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병사들은 수송선에 우겨 넣어져서 강을 건너 전장인 도시로 향한다. 적의 급강하 폭격기가 급강하하면서 기관포와 폭탄을 퍼붓자 겁에 질린 병사 몇이 배에서 뛰어내린다. 그러자 장교들이 그들을 사살한다. 그렇게 강둑에 도착한 병사들은 곧장 적진으로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명령을 따른 병사들은 적의 화력에 순식간에 사살당하고 상황을 버티지 못하는 병사들은 후퇴하려 한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갈 길은 없다. 아군의 총이 후퇴하는 자신들을 사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병사들은 돌격만 하다 허무하고 비참하게 죽어간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그렇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2001)의 도입 장면이고 또한 영화의 장면을 거의 그대로 옮겨온 FPS 게임 <콜 오브 듀티 1>(2003)의 소련군 미션 도입부의 연출이다. 영화와 게임의 두 장면에서 상술한 장면은 영화와 게임의 전체 시간으로 볼 때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다. 그러나 두 작품은 관객과 게이머에게 소련군에 대해 확실한 인상을 심어 준다. 전략과 전술이 없다시피 하여 무조건 병사들을 돌격시키는 무지함과 비효율성, 명령을 있는 그대로 수행하고 유연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경직성, 빈약한 무장의 병사들이라도 전장에 투입시키는 비정함과 냉혹함, 그리고 후퇴하는 아군을 돌려세우기 위해 아군을 사살하는 잔인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군대라는 인식을 말이다.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한번 물어 보겠다. 

위의 영화와 게임에 나온 장면은 정말로 진실인가?

답은 일단은 '그렇다' 이다. 영화 속의 장면 자체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소련군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는 제284 소총병 사단 소속이었는데 실제 그 사단의 3개 소총병 연대 중 1개 연대만이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의 소총병 연대의 단대호는 네 자리 수가 넘어간다는 점에서 소련군의 모든 소총병 연대들이 1942년 말에 그런 상황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감독과 각본가에게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영화 속 장면은 실제 소련군 전체에서 지엽적인 상황이었음에도 관객들에게 그 상황이 전체 소련군의 상황이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 연출로 관객들은 소련군에 대해 상술한 시각적인 인상을 받게 되었고 그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소련군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단지 21세기 초의 영화와 게임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18년부터 1991년까지 존재했고 그 후신이 있는 소비에트 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근원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직후부터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뿌리가 깊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현대 제2차 세계 대전사를 다루는 상당한 양의 역사서들과 매체들로부터 확대되고 재생산되어 흡사 그게 소련군의 실상이자 진실로 기정사실화 되었다. 서구 대중이 그런 인식을 진실로 알게 됨에 따라 소련군은 완벽히 부정적 존재로만 남게 되었다. 상상력 없이 단순한 정면공격밖에 모르는 군사술(=용병술), 독일군의 총과 독전대의 총 사이에 껴서 벌벌 떠는 병사들, 무능하고 경직된 지휘만 하는 지휘관, 안전한 곳에서 잔소리만 하는 정치위원, 시체의 산을 이루면서도 계속 진격하는 부대들, 그리고 압도적으로 밀려오는 소련군을 상대로 효율적이고 멋지게 싸우는 독일 국방군, 이게 제2차 세계대전의 동부 전선, 소련과 현대 러시아 및 러시아 외의 구 소련 구성국들이 '대조국 전쟁'이라 부르는 전쟁과 소련군의 군사술에 대한 서구 사람들의 대체적인 인식이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소련군 전체와 소련군의 군사술에 대판 고정관념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역사 서술뿐만 아니라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시청각 매체에서 계속 재생산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인식의 근원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공고화되고 대중화되었으며, 또 학술적 수준에서 어떻게 극복되었는지 여기서 논하려 한다. 


편견은 무엇인가

역사적 현실을 보는 관점에는 필연적으로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틀을 만들거나 유지하려 하지만 다양한 요소들이 사실을 왜곡시키고 역사를 보는 부수적인 관점을 만든다. 이 과정은 필수불가결적이고 역사학자들의 전문성과 원칙에 도전하고 있다. 가끔 이 도전은 총체적으로 극복되기도 한다.

역사적 객관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잠재적인 요소는 편협함이다. 편협함은 사람이 역사를 고려하고 보는 시야를 좁게 만들고 역사를 보는 사람과 관계없는 나라나 지역의 역사를 왜곡되게 보이게 한다. 편협함은 역사학자들의 요구에 따라 반응하기도 하는 것이다. 문화적, 이념적 차이는 이 경향을 서로 극단에 서 있는 국민들의 관점 차이를 악화시킨다.

역사적인 계산이 깔린 사료들의 문제는 편협한 관점이 등장하는 데 공헌했다. 역사학자들은 가지고 있는 사료를 사용했고 그 사료가 제한되고 그들의 관점을 좁히는 것이라도 사용했다. 뛰어난 학자들은 이 한계를 알아챔으로서 과거를 재구성한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편협함이나 좁은 시야는 편견으로 계획적이거나 계획적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계획적이지 않은 편견은 편협한 관점과 똑같은 압력을 낳는다. 

의도적인 편견은 정계, 종교계, 재계와 같은 외부 기관의 영향의 산물이거나 역사학자들 스스로의 이념적, 정치적 믿음으로 만들어진다. 편견, 특히 계획적인 형태의 편견은 더 복잡하고 더 치명적이기까지 한 편견은 단순한 편협함의 관점보다 더 위험하다. 편협함은 학자들이 더 폭넓은 사료를 접할 수 있음에서 극복할 수 있지만 편견은 학자들이 사료를 취사선택하고 자신들이 미리 받아들인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료를 배재함으로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소수의 20세기 사건들만이 편협함과 편견에서 벗어났다. 금세기에 가장 중요한 기간에 심대한 편견이 나타난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동부 전선, 독소 전쟁이고 편견이 나타난 조직은 노동자-농민의 붉은 군대, 곧 소련군이었다. 엇갈리는 관점, 편협함, 그리고 철저한 편견은 모든 부분에서 군사사를 흩트려놨고 몰이해와 적개심을 오랫동안 지속되게 했다. 미국의 학자이자 평생 이 분야를 다뤄 온 데이비드 M. 글랜츠는 자신의 연구에서 그러한 편견들이 무엇인지 이렇게 정리했다.

- 기상 상황이 계속해서 독일의 작전술적 목표 달성을 막았다.
- 소련군은 전쟁 내내 작전 수행 시 독일군에 대한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가졌다.
- 소련군의 인력은 계속된 손실을 무시하고도 끊이지 않았다.
- 소련군의 전략과 대규모 작전 지도력은 뛰어나지만 낮은 수준의 지도력은 떨어진다.
- 소련군의 작전 계획은 경직된 것이었고 모든 수준의 작전 수행은 상상력이 없었다.
- 소련군은 가능하면 기동보다 물량으로 성공을 꾀했다. 소련군은 포위 작전은 될 수 있으면 피했다.
- 소련군은 2개 제파로 작전을 하며 제파 사이를 연결해 주는 병력은 없고 직선 축선으로만 공세를 한다.
- 무기대여법은 소련의 승리에 결정적이었다.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소련은 붕괴되었다.
- 히틀러는 패배의 전적인 원인이다. 히틀러가 아닌 군사전문가들이 독일의 초기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 '등뒤의 칼' 전설의 또 다른 형태다.)

이걸 본 독자들 중에는 글랜츠가 명시한 편견들 중 편견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특히 무기대여법) 하지만 여기에서는 국내에서도 소수만 제대로 아는 사안이 아닌, 최소 1990년대까지 이미지로서 만들어진, 더 대중적인 편견을 다루고 있으며 그 이후의 학술적 연구를 통한 사항은 반영하지 못했음을 먼저 알려드린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후의 연구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아직 인식이 1990년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때문이다. 그래서 비판의 대상을 그 이전 시기의 이미지로 잡아야 했다.

이러한 편견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를 알아보려면, 최소 18세기 서유럽 세계가 러시아를 어떻게 보고 받아들였는지 부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러시아공포증의 발흥

러시아의 이반 4세(일명 이반 뇌제)가 영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무역을 시작하면서 서유럽 국가와 러시아간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영국 상인들은 모스크바에 무역회사 “모스크바 상사”를 설립하고 러시아와의 무역에서 자국산 직물과 수공업 제품을 판매하고 러시아산 농산물을 사들였다. 러시아의 동란 시대에 잠깐 멈췄던 양국 간의 무역은 러시아가 안정을 찾은 후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두 나라 다 이 무역으로 공동의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중반부터 영국 대중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러시아를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고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을 패퇴시켜 북유럽의 패자로 등극한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가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었다. 그 유언에 따르면 표트르 1세는 러시아의 국가전략은 힘의 추구고, 그 힘은 군사력으로 달성할 수 있으며, 군사력을 통한 정복과 공격적인 영토 확장이 러시아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후손들에게 가르쳤다. 영국 왕실이나 정부가 의도하지 않은 이러한 문서의 유행은 러시아 국가와 러시아인들이 기본적으로 공격적이고, 호전적이며, 군사적 충돌도 서슴지 않는다는 위험한 사람들이란 인식을 영국인들 사이에 퍼트렸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에 따라 러시아와 영국이 언젠가 충돌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공포증(Russophobia)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한 일명 “표트르 대제의 유언”은 프랑스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인들 또한 러시아를 그렇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의 프랑스 왕실은 러시아가 7년 전쟁에서 보여준 일방적인 동맹 이탈과 프로이센과의 단독강화 때문에 적대감정이 강한 상태였다. 

그리고 일명 “예카테리나 2세의 발칸 프로젝트”라는 문서가 나돌기 시작했다. 예카테리나 2세가 발칸 반도를 러시아의 핵심이익이 달린 곳으로 판단하고, 발칸 반도를 투르크나 오스트리아로부터 빼앗고 그곳을 러시아가 차지해야 한다는 인식을 국가시책으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이는 “표트르 대제의 유언”으로 형성된 러시아인이 호전적이고 침략을 추구한다는 인식을 더 강화시켰다. 

그러나 현대의 서지학적 고찰을 봤을 때, 두 문서 다 조작된 위서였다. 표트르 대제는 그런 유언을 남긴 적도 없고 예카테리나 2세는 그런 계획을 세운 적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문건은 신빙성 있는 자료이자 러시아를 이해하는 틀로 유행했다. 정작 당시 러시아의 지도층은 영국을 주요 무역 파트너로 보았고, 프랑스는 문화적 동경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로 대화하는 걸 교양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열린 빈 회의에서야 이 괴문서들의 존재를 알고 아연실색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빈 회의에서 그런 문건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러시아는 절대 이 문건들에 실려 있는 데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납득시키려 애를 썼지만, 이미 형성된 인식을 쉽게 무너트리기에는 부족했다. 그리고 1860년대에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의 칸국들을 무너트리고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면서 영국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의심을 부추겼다. 영국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침공이 영국령 인도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보았고, 이는 러시아와 영국 간의 외교적 갈등, 일명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되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인도를 위협할 의도도 아니었고, 당시 인도 총독부와 주둔군 장교들이 위협을 과장한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호전적이고, 심지어 “몽골 핏줄이 섞인” 야만적이라는 인식은 이 외교적 갈등들을 계기로 더욱 서구 대중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독일의 러시아 인식의 변화와 편견의 형성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대중들과 달리, 나치 독일 국방군의 조상인 프로이센군의 군인이 러시아를 보는 인상은 원래 나쁜 게 아니었다. 비록 두 나라가 7년 전쟁에서 충돌을 하긴 했지만, 프로이센 군인들은 조른도르프 전투와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보여준 러시아군의 전투력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것에 존중을 표했다. 그리고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때 대프랑스 동맹의 주요국가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1809년의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러시아군이 위기에 처한 프로이센을 도와 나폴레옹의 대육군과 맞섰으며, 1813년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도 프로이센군은 영국군,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러시아군의 대프랑스 동맹군으로서 싸웠다. 이후 프로이센과 러시아 모두 빈 체제의 주요 가맹국으로서 활동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러시아에 대한 좋은 인상은 비스마르크의 시대 때 그가 프랑스를 견제하고 유럽에 자신이 구상한 세력균형을 만들기 위해 러시아에 우호적으로 접근하면서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관계는 삼제동맹의 결성으로 공고화되는 등 독일인이 러시아인에 대한 악감정을 가질 이유는 이때까지만 해도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만연했던 러시아공포증은 아직 독일에서 일어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독일과 러시아가 1870년대 중반부터 마찰을 일으키며 이러한 시절이 끝나기 시작했다. 1878년의 베를린 회담의 결과로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러시아가 투르크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더 큰 이익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자 러시아가 삼제동맹을 탈퇴할 때부터 균열이 시작되었다. 비록 비스마르크의 수완으로 러시아가 삼제동맹에 다시 가입하여 갈등이 봉합되었긴 했지만, 이 때부터 양국 간에 일어난 균열은 러시아에 적대적인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전 유럽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발흥하던 19세기 후반부터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독일 군인이 러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은 부정적인 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유산인 국민국가의 탄생과 민족주의의 발흥은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문화와 행동 양식의 구분은 타고난 것이며 뿌리 깊은 특성이라고 보게 만들었다. 빌헬름 2세의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과 발칸 반도에서의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충돌 등으로 인한 독일과 러시아간의 정치 및 경제적 대립이 커지면서 독일에서는 러시아를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 벨린스키, 샬티코프, 네차예프, 차이콥스키, 글린카, 세체노프, 파블로프, 그리고 루먄체프, 수보로프, 쿠투조프, 드 톨리, 바그라치온의 나라가 아닌 전제주의만 존재하는 혼돈의 땅으로 보고 러시아인은 자존심이나 의식도 없고 보드카와 매독으로 스스로를 망가트리는 원시적인 사람들로 보는 경향이 크게 나타났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은 본질적으로 두 종류의 사유로 구성되었다. 첫째로, 러시아는 광대하지만 취약하다는 이미지였다. 당시의 독일 선전물들은 러시아를 “진흙 발의 거인”으로, 즉 결점밖에 없는 왕국으로 묘사했다. 둘째로, 러시아는 본래 공격적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력을 사용하여 러시아인들에게서 동부 지역을 강탈하려는 독일인의 욕망을 완곡하게 에둘러 표한한 문구, 즉 독일의 “동방으로 질주”에서 잘 나타나 있다. 20세기로 접어들자마자 독일인들은 슬라브인과 독일인 사이의 영토를 둘러싼 "불가피한 최후 결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에 대한 독일인의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적 인식의 한 가지 특징은 독일인이 러시아인보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슬라브인보다 정치, 경제, 군사, 지식수준에서 우월하다는 가정이었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러시아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독일인들처럼 행동하지도 않았고, 경제 발전의 격차를 줄일 수도 있었던 건설적인 교류를 촉진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고방식은 오히려 호전적인 인식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즉, 영토가 독일인들에게 불리하게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동방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통치하고 경제적으로 약탈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러시아를 공격한다면 러시아 제국이 신속하게 붕괴될 것이라는 가정으로 연결되었다.

실제 1차 대전의 동부전선은 겉보기에는 그래 보였다.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독일 제국군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탄넨베르크, 마수리안 호반, 고를리체-타르노프, 리가 등지에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 승리는 러시아군이 신중하고 광범위한 준비도 없고 병사들이 너무 원시적이어서 현대 전쟁에 적응할 수 없는 취약한 군대로 보이게 했다. 독일군에게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거둔 성공은 그냥 오스트리아가 못나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차르 체제의 붕괴와 구체제 군대의 군율의 붕괴는 러시아군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정형화된 인상을 강화시키기만 했다.

여기서 비롯된 러시아의 군사적 열등 때문에 동부전선에서 지휘를 하면서 동부전선에 전략적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힌덴부르크 및 루덴도르프와 전쟁은 서부전선에서 종결될 것이며 동부전선은 부차적인 전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참모총장 팔켄하인이 갈등을 일으켰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독일군의 전략과 정책이 1916년 이전에 러시아 제국에서 식민지를 가져와 일명 동부 제국(Ostimperium)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참모였던 막스 호프만 같은 상대적으로 침착한 장교들은 독일군이 흑해에 다다를 수 있을 지에 심사숙고했지만, 이러한 의견의 맥락에서 최근의 동부 전선의 점령지는 쉽게 점령하고 빼앗을 수 있었다는 결론에는 그들도 동의했다. 

전간기 독일의 러시아 인식: 편견의 본격적 시작

러시아에 대한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적 인식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에 대한 이미지의 윤곽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독일의 민족주의자들은 새로운 방어 논변을 발전시켰는데, 독일이 볼셰비즘을 막아내는 벽 또는 보루라는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 및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위시한 스파르타쿠스단의 혁명이 좌절된 것을 계기로, 독일의 보수층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그 총본산인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공포가 더 강화되었다. 그에 따라 독일이 볼셰비즘을 막아내지 못하면 서유럽 전체가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신을 부정하는 사악한 공산주의에 휩쓸릴 것이라는 논리가 형성된 것이었다. 

1920년대에 신생 폴란드라는 공공의 적을 둔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라팔로 조약을 통해 실시한 두 군대간의 군사교류는 이러한 이미지를 어느 정도 개선시킬 계기가 되었다. 독일과 소련의 장교들은 서로의 군사교육기관에 연수를 갔고, 소련의 리페츠크에 있는 항공기 훈련장과 카잔에 있는 전차 훈련장에서 같이 훈련을 했다. 그에 따라 양국의 장교단 내에서는 서로의 체제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장교들이 등장했다. 예컨대 훗날 히틀러에게 충성하고 또 전쟁장관의 자리에 오르지만 히틀러와 충돌하다 재혼한 부인의 포르노 사진 건으로 꼬투리를 잡혀서 해임당한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1928년에 소련에 연수를 다녀온 뒤 소련군의 성과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블롬베르크는 붉은 군대가 단지 인기 없는 정부의 세련되지 못한 경호원이 아니며 소련군이 정말로 국민군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블롬베르크가 보기에, 러시아 군인들의 군기는 놀라웠고 러시아군의 훈련은 실제적이었으며 러시아군의 장비는 계속 향상되고 있었다. 블롬베르크를 비롯해 소련으로 연수를 간 장교들 중 적잖은 인물들은 소비에트가 외국인에 대한 러시아의 전통적인 열등의식을 극복하는데 성공했으며 그 나라가 문화와 경제 발전의 희망을 간직한 동적인 국면을 경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심지어 나치 장군으로 유명한 발터 폰 라이헤나우 까지도 소련과의 군사교류 중단을 아쉬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블롬베르크 등의 관점은 소수의 관점에 불과했으며, 그러한 다소 긍정적인 평가 내에서도 기존 장교단의 반소비에트, 반볼셰비키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훗날 국방군 최후의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제3 제국의 멸망과 운명을 함께한 한스 크렙스는 소련의 투하쳅스키 원수가 1932년에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교활한 유대인, 잡종 유대인, 신실하지 못하고 본성상 의심이 많고 불충하며, 확실히 광적인 공산주의자” 그리고 이게 독일 장교단 대부분이 소련 장교단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계속되는 교류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자 가장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고 반공주의와 엘리트의식으로 가득한 독일 장교단의 시선에서는, 여전히 러시아인은 우월한 독일인보다 열등한 민족이고, 공산주의 소련은 기본적으로 사악하고 침략을 지향하여 독일의 안보를 위협하는 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반유대주의가 가세하였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의 배신행위로 독일이 패배했다는 주장을 신봉하기 시작했는데, 이 음모론이 더 심화되었다.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에 따르면 볼셰비키 당의 인물들이 레닌처럼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거나 트로츠키처럼 유대인이니 공산주의 혁명은 유대인의 세계지배 음모의 일환이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보수적인 장교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가 유대인의 음모가 만들어낸 산물이고 유대인의 조종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독일을 무너트리려 한다는 “유대-볼셰비즘”이란 경멀적 단어가 돌아다녔다. 그리고 히틀러와 나치는 이 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유대인이 절대 호의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대게 당시의 맥락에서 라팔로 조약에 따른 군사교류에서 분명 상호간에 긍정적인 영향을 동등하게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열등하며 멍청한 동쪽의 이웃 나라에 더 현대적인 전쟁 방법을 일방적으로 가르쳐주었다고 기록하였다. (독-소 군사교류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지금도 남아있다)  이 신화는 당대의 이념적 적대감에도 반영된 것이었다. 전간기 서구 세계의 어디서나 퍼진 공산주의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문화의 기술과 진보의 발상들에 의존하는 기생충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적대감 말이다. 히틀러의 논리인 “열등한 슬라브인” 주장과 같은 발상이 이미 나치 집권 전부터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내제되어 있던 것이다.

전쟁 동안에도 히틀러를 반대한 군 내 세력조차도 1930년대 나치 선전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반볼셰비즘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히틀러 반대 세력조차 소련을 정말로 독일의 적국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반볼셰비즘에 대한 근본적 합의에 따른 것이며 어느 정도는 슬라브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태도에서도 기인했다. 그러므로 국방군 수뇌부의 뇌리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러시아관은 1900년 전후 시기 이래 독일 사회의 어떤 집단 속에 이미 존재한 민족주의적 사조의 전통과 닿아 있었다. 이들의 민족주의적 러시아관은 인종주의적이거나 반슬라브적인 경향을 보였으며, 아시아가 서양을 위협한다는 황화론, 일명 “아시아적 야만”의 맥락에서 주조되고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아시아적 야만”에 히틀러는 기존에 존재하던 반유대주의, 반볼셰비즘, 반슬라브주의를 결합시켰다. 나치의 논리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우월한 아리아 민족”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유대인이 지배하는 소비에트 연방은 반드시 무너트려야 할 적이자 야만스런 아시아인의 혈통이 섞인 열등인종들의 국가로 받아들여야 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의 수뇌부가 보기에, 러시아인들은 풍요로운 동쪽 땅을 차지하고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열등한 인종이고, 러시아인들의 땅은 마땅히 우월한 아리아인이 생활권(레벤스라움)으로 차지해야 했다.(어찌 보면 힌덴부르크의 “동부 제국” 주장의 재판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은 자기모순과 기만의 왕국이고, 문을 한번 열어젖히면 대번에 무너질 진흙 발의 거인에 불과했다. 이러한 인식의 나치와 군의 대러시아 인식을 지배했고, 이것은 결국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에 깔린 가정이었다.


편견의 결과

처음에는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독일 국방군은 전쟁 첫 몇 달 만에 소련군에 500만 이상의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해 들어갔다.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문제는 독자 여러분도 다 알고 있듯이, 거인의 진흙 발속에는 무슨 철심이라도 숨겨져 있었는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또 그 거인은 큰 피해를 입어도 쓰러지지 않았으며, 거인을 쓰러트리지 못한 결과 무너진 거인은 히틀러와 국방군의 수뇌들이 희망한 것의 반대쪽이었다. 파멸한 쪽은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닌 독일의 국방군이 되었고 점령당한 수도는 모스크바가 아닌 베를린이 되었고,  지하벙커에서 자살한 사람은 스탈린이 아니라 히틀러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이 가진 소련군에 대한 편견도 짚고 넘어갈까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군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프로이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으로서 유구한 독일 애호 성향을 가지게 된 일본군은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소련군에 대해 심각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에서 자신들보다 유연성이 떨어지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군사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이때의 경험 때문에 소련군도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교범에서 소련인들은 순종적이고, 유순하고, 권위에 쉽게 복종하며, 외부의 압력만 있으면 소련인들은 쉽게 절망하고 좌절하니 이와 비슷하게 소련 병사들도 그들의 민족성 때문에 명령을 문자 그대로 따르고 둔하게 명령을 수행한다고 적어 놓았다. 즉, 소련군의 측면을 공격해 보급선만 끊으면 소련군은 일본군의 “속전속결”원칙에 따라 빨리 무너질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일본군은 1939년 8월에 할힌골에서 속전속결로 소련군을 끝내려다가 자신들이 속전속결로 포위당했다. 그럼에도 소련군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지 않던 일본군은 1945년에는 결국 만주의 관동군 전체가 속전속결로 한 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까지 보면 독일군과 일본군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전제하에 소련과의 전쟁을 수행했고, 그 결과가 그들의 패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통념대로라면, 전쟁의 승자인 소련군이 어떻게 초반의 열세를 이겨냈는지, 어떻게 잃어버린 국토를 전부 되찾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적국의 수도까지 점령할 수 있었는지의 문제가 조명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었다. 

편견의 전파: 독일 주도의 2차세계대전사 서술

그러나 이후, 우리의 통념에 반하는 일이 일어났다. 서구 세계에 동부 전선은 1943년까지 거둔 독일군의 커다란 전과와 쾌속 진격, 그리고 1943년 이후로는 독일군의 효과적이지만 처절한 방어로 기억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전후 서구권에서 독일 측의 시각이 강하게 반영된 역사서술이 나타나고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패자가 쓴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독일의 시각이 강력히 반영된 제2차 세계대전사와 그 안의 동부 전선의 역사에 대한 서술은 전쟁 종결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쟁이 끝나고 냉전 체제가 시작되던 1946년, 서방 연합군의 최대의 적은 철의 장막 너머에 있는 소련군이었다. 소련군이 새로운 주적으로 떠오르자 연합군은 소련군이 구사하는 군사술에 맞설 군사술과 군사교리가 필요했다. 여기에 대해 직접적인 정보를 얻을 세력은 바로 소련군과 직접 전쟁을 치른 당시는 없어진 독일 국방군의 장교들이었다. 그 때문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비롯한 여러 재판들에서 국방군의 장성들은 전쟁범죄에 관해서 기소되었다 하더라도 유독 무죄 판결이나 낮은 형량을 받았으며, 높은 형량을 받았다 하더라도 몇 년 안가 병보석 등으로 풀려나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사회로 나간 전직 국방군 장교들은 미군에 자신들의 동부 전선 경험을 말해 주고 그걸 글로 쓰면서 서독연방군의 창설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1946년 6월에 미국 국방부의 역사과(Historical Division)에서 대부분 장성이었던 328명의 독일 전쟁 포로들이 미군이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사 서술에 참여했고 1948년 3월에는 1,000건이 넘는, 일명 “국방부 팜플렛”을 비롯한 문건들을 대규모로 작성했다. 34,000권이 되는 분량이었다.  그리고 역사국에서 전직 국방군 장교들을 이끄는 인물은, 국방군의 나치화 시도에 저항하고 히틀러의 군사적 반대자였던, 그럼에도 히틀러의 참모총장직 제의는 끝내 거절하지 않고 1939년에서 1942년까지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제3 제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크게 기여한 인물인 프란츠 할더였다. 프란츠 할더는 15년 동안 역사국에서 근무했고 그곳의 전직 국방군 장교들의 역사 서술을 감독하고 지시했다. 할더는 그곳에서 일종의 정치적 지침과 같은 것을 확정했다.

"사람들(역사과의 전직 장교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전쟁에서 거리를 두려 했다. 첫째, 국방군이 수행한 깨끗한 전쟁과 나치 친위대의 더럽고 범죄적인 작전을 구분하는 방법, 둘째, 전략 전술적 실패를 자신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어려운 자연 환경과 히틀러의 아마추어적 광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방법. 첫째 것이 도덕 수준의 방법이라면 둘째 것은 군사술 수준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칼루스헤에 위치한 미군의 독일작전사팀의 책임자이기도 했던 할더는 제2차 대전사 분야에서 일인자의 위치를 차지했다. 실제 할더는 국방군의 승리의 시기를 이끈 산증인이었고 자신과 히틀러의 긴장 관계를 부각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나치즘 및 전쟁 범죄와 무관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많은 저자들이 할더를 부담 없이 접할 수 있었다. 회고록 작가와 역사가, 전쟁 주제를 다루는 작가, 신문 편집인에 대한 할더의 영향은 상당했으며 역사과 내에서 할더는 전직 장교들에게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장군님”으로 불리며 권위를 행사했다.

전직 국방군 장성들의 역사서술 주도에서 전쟁 때 북부 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한 게오르그 폰 퀴흘러 원수는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지침을 남겼다. 폰 퀴흘러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따르도록 했다. "독일의 관점에서 볼 때 기록되어야 할 것은 독일다운 행동이다. 이것은 우리 군의 기념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국방군 참모 본부가 하달한 조치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지 않는다. 명령을 수행하는 자는 어떤 경우든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 국방군의 업적은 제대로 평가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입다.

그리고 1950년대에 세계대전 동안 군에서 고위 지휘관을 지냈고 전후 연합군의 지원을 받으며 여러 역사 서술 계획에 참여한 많은 장교들이 회고록을 저술했다. 그 대표작으로는 프랑스 침공의 주역이자 독일 남부 집단군 사령관이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의 『잃어버린 승리』, 역시 프랑스 침공의 주역이고 독일 기갑부대의 신화를 만들었으며 기갑총감과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의 『한 군인의 회상』, 그리고 아프리카 전선, 동부 전선, 서부 전선을 모두 경험한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소장의 『기갑 전투』등이 있었다. 이들의 목적 또한 할더 및 퀴흘러의 목적과 비슷했다. 위로는 만슈타인 원수부터 아래로는 전차장 오토 카리우스에 이르기까지, 동부전선 참전자들은 독일 민족주의의 전통적인 러시아관/소련관과 반공주의, 그리고 전쟁이 “무신론자들에 대항한 기독교 국가의 수호”였다는 인식에 입각하여 서술을 했고 이것은 “반공 십자군” 독일군을 상대한 소련군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낙인찍는데 기여했다. 그럼에도 회고록들은 전후 전쟁사를 이해하는 주요 자료로 쓰였다. 

이 움직임에 가세한 인물은 영국의 군사이론가 바실 리델 하트였다. 리델 하트는 전직 국방군 장성들을 전범재판에서 변호했고 그들의 변호인단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어떻게든 깨끗한 독일 국방군의 이미지를 도출시키려고 애를 썼다. 리델 하트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걸 패자에 대한 영국 신사다운 관용이라고 하지만, 리델 하트의 숨겨진 의도는 전혀 순수하지 못한 것이었다. 리델 하트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국방군 장성들을 변호하고 그들과 깊고 어두운 관계를 맺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전쟁 종결 시점에서 리델 하트의 군사사상가로서의 명성은 크게 실추된 상태였다. 리델 하트는 분명 1920년대에 스승인 J.F.C. 풀러와 함께 기계화 부대를 통한 기동전과 기계화 부대의 양성을 주장했지만, 1930년대로 들어가며 자신의 이전 주장을 전부 부정하고 다른 군사이론가들처럼 진지전과 방어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도리어 시대에 역행하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리델 하트는 자신이 영국 정부와 군으로부터 계속 무시당했다는 자신의 주장과 달리, 체임벌린 내각에 영향을 주는 주요 군사 조언가들 중 하나였으며, 자신의 간접접근 이론에 따라 유럽 대륙에 대한 영국의 군사적 개입을 자제하자는 의견을 낸 사람이기도 했다. 즉, 체임벌린 내각의 유화정책의 실패에는 리델 하트의 책임도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1940년 5월에는 독일의 프랑스 침공 때 프랑스의 완승을 예측하며 조만간 독일이 항복할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래서 결국 거짓 선지자가 되어버린 리델 하트는 영국 정부의 신임을 완전히 잃으며 명성이 크게 실추되었던 것이다. 

리델 하트는 그러자 독일 장군들과 야합하기로 결정했다. 전쟁에서 큰 성과를 보여준 독일군의 기동전의 모태가 자신의 이론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독일 장군들이 자신의 주장이 맞는다고 인증해 주기 위해서는 이들을 전범재판에서 도와주고 그들을 변호하는 책과 인터뷰를 출간해야 했던 것입다. 재판을 받던 독일 장군들도 리델 하트를 이용해서 무죄나 가벼운 형을 받아내기 위해 이 야합에 동참했다. 당시의 인물인 영국군의 펄크 중령의 회고에 따르면, 독일 장군들은 감옥에서 리델 하트에게 뭘 말해주고 뭘 말해주지 않을 지를 사전에 논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펄크 중령이 그 사실은 리델 하트에게 전해주자 리델 하트는 깨끗한 독일 장군들이 그럴 리 없다며 펄크 중령의 말을 무시했다는 겁다. 그리하여 리델 하트는 하인츠 구데리안과 야합하여 구데리안이 회고록에서 독일군 기갑부대 발전에 리델하트의 영향이 있었다고 쓰게 했고 롬멜의 유가족들 및 프리츠 바이얼라인과도 야합하여 롬멜도 리델 하트의 사상적 제자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리델 하트는 독일 국방군의 이론적 스승으로 떠받들어지며 신화를 만들었고 이 신화는 1980년대가 끝나갈 때야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이 신화는 우리나라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할더 등이 주도한 역사서술과 만슈타인 등의 회고록들, 그리고 기타 독일의 집단군, 야전군, 군단, 사단 소속의 참전자들은 수요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수적 우위와 끝없는 포격 하에 행해지는 인해전술,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무수한 소련군 기갑 부대와 대적했다고 주장했다. 소련군 규모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에는 적 부대 각각의 작전술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여 독일 저작들이 소련군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상상력 없이 단순한 정면공격밖에 모르지만 막대한 물량을 가진 소련군이 뛰어난 능력과 기교 넘치는 기동을 구사하는 독일군을 이겼다는 주장을 깔아 놓았다. 그들은 소련군의 '스팀롤러'가 동유럽에 그들의 시체와 부상자를 끝없이 쌓았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독일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유는 딱 세 가지, 히틀러 상병의 무능과 광기, 러시아의 무시무시한 동장군(과 진흙장군), 그리고 끝없이 몰려오는 러시아의 농민들이었다. 그러한 결과 프룬제, 스베친, 투하쳅스키, 트리안다필로프, 예고로프, 샤포시니코프, 이세르손, 세댜킨, 예데만, 라프친스키, 칼리놉스키, 할렙스키, 바르폴로메예프 등의 세계 최초로 전략과 전술 사이에 존재하는 작전술 개념을 발견하고 이를 종심 작전이라는 기계화된 기동전으로 발전시킨 인물들과, 주코프, 바실렙스키, 로코솝스키, 코네프, 안토노프, 시테멘코, 바투틴, 말리놉스키, 메레츠코프, 톨부힌, 고보로프, 보로노프, 바그라먄, 체르냐홉스키, 카투코프, 보그다노프, 리발코, 렐류셴코, 로트미스트로프, 크랍첸코, 추이코프, 크릴로프, 모스칼렌코 등 그걸 전쟁에서 실행에 옮긴 사람들의 업적들은 서방에서 망각의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군사술을 발전시킨 것이 아닌, 단지 풀러와 리델 하트의 가르침을 받은 독일 스승들의 영향을 받은 아류 제자라는 함의를 담은 가설까지 등장하였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편견

이러한 역사기술 경향은 오랫동안 서방의 역사 기술을 지배해 왔으며 지금도 그 유산이 남아 있다. 특히 미국 사회의 소련관이 극단화되면서 서구 세계에 더 잘 받아들여졌다.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인들에게 소련은 사유재산과 신을 부정하는 사악한 무신론 전체주의 국가였고, 소련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소수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운동가들밖에 없었다. 물론 당시 미국과 소련이 서로 직접 충돌할 일이  없어서 신문 국제면에서 소련이 크게 다뤄지지 않았지만, 미국인들은 대게 소련에 대해서 사전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독-소 불가침조약 때문에 미국 언론 중에서는 독일-소련-일본의 3대 전체주의 국가가 동맹을 맺을 거라는 전망을 내놓은 언론사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며 극적으로 변했다. 미국 언론들은 삽시간에 소련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당시의 미국 언론에서 러시아인들은 독일의 야만적인 침략에 저항하는 용감한 사람들로 나타났고, 스탈린은 사악한 독재자가 아닌 현명하고, 강인하고, 인간미 넘치는 지도자 “엉클 조”(Uncle Joe)였으며, 소련군은 야만스런 군대가 아닌 전문적이고 과감한 군대고, 그걸 지휘하는 티모셴코 원수와 주코프 원수는 천하에 둘도 없는 명장으로 나타났다. 동부전선에 파견된 미국 종군기자들은 소련 군인들이 나치가 선전하는 데로 야만스런 사람들이 아닌 인간적이고 문맹이 퇴치되었으며 지적 수준도 좋은 사람들이라는 기사를 썼다. 그러한 분위기 내에서 미국인들은 러시아인이 열등하고, 소련군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며 뭐든 것이 바뀌었다. 소련과 미국의 국익이 충돌하고, 조지프 매카시가 광적인 공산주의 사냥을 시작하면서 미국 언론들의 보도 태도는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엄연히 따지면 전쟁 전 미국인들의 소련 인식이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상 냉전이 시작될 때의 보도태도는 사실 나치 선전기관들의 반공, 반소 선전의 맥락에서 크게 차이가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현명하고 강인한 소련군은 “아시아인”의 피가 섞이고 독일 여성을 강간하는데 정신이 팔린 포악한 야만인이 되었고, 과감하고 뛰어나다고 보도된 소련군의 체계는 비효율과 무능의 극치로 보도되었으며, 스탈린은 다시 피에 굶주리고 세계적화에 광분하는 독재자로 보도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내에서 서구권 전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러시아공포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기존의 부정적인 러시아관이 반공주의와 소련에 대한 공포와 결함되었다. 그리고 위서 “표트르 대제의 유언”이 어떠한 사료비판도 거치지 않은 채 망각 속에서 부활하여 스탈린의 외교정책을 해석하는 주요 사료로 활용되었다. 이 맥락에서 미국인들은 문화적으로 더 친숙한 독일 장교들의 인식과 서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들에게 강한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독일 국방군의 군인들은 나치의 전쟁범죄와는 거리가 먼,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사악한 소련군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되었다. 

독일 자료의 문제

 그러한 맥락에서 형성된 소련군에 대한 인식 문제는 단지 독일 관점의 사료가 역사 서술에 주로 인용되었다는 게 아니었다. 그 자료의 신뢰성이 문제였다. 예를 들어 구데리안은 회고록의 대부분을 프랑스 침공에서 제19 기갑군단을 지휘하던 때와 소련 침공에서 제2 기갑집단을 지휘하던 시절에 할애하고 있다. 이 시기는 구데리안과 독일 국방군에게 승리의 시기였는데 특히 소련 침공에 대해서는 1941~1942년 동안 제2 기갑집단의 지휘 경험을 주로 쓰고 있다. 이후 구데리안은 독일의 승세가 기울던 시절의 경험에 대해서는 전체에 비해 얼마 할애하지 않았다. 만슈타인은 더 심각한다. 만슈타인의 회고록은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자신이 패배하던 시기인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이후는 딱 한 장으로밖에 다루고 있지 않다!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의 책도 마찬가지였다. 멜렌틴은 소련군에 대한 정보가 없이 소련군의 의도와 기도를 오해하고 서술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치르 강 전투에 대한 서술이 있다. 멜렌틴은 제1 전차 군단을 첫째로, 제5 기계화 군단을 둘째로 투입한 소련 제5 전차군을 상대로 한 독일 제48 기갑 군단의 훌륭한 작전을 기술했다. 1942년 12월 7~8일에 제11 기갑 사단은 제79호 집단 농장에서 제1 전차 군단의 돌파를 막고 19일에 제1 전차 군단을 격퇴하고는 후속한 제5 기계화 군단을 상대했다. 제11 기갑 사단의 전술적 상황에 대한 멜렌틴의 생생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멜렌틴은 전술적 성공 뒤에 벌어지고 있던 작전술적 재앙에 대해 기술하는 걸 회피했다. 사실 소련군 제5 전차군의 목적은 제48 기갑 군단의 신경을 끄는 것이었고 그 동안 북서쪽에서는 소련군이 이탈리아 제8군을 무너트리고 홀리트 분견군에 대타격을 입히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멜렌틴은 소련 제1 전차 군단이 11월 19일부터 지속적으로 작전을 계속해 왔고 치르 강으로의 진격이 시작됐을 때는 그 전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할더의 주도로 작성되었고 오랫동안 소련군을 연구하는데 1차 사료로 쓰인 미 국방성 팜플렛들도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에를 들어 국방성 팜플렛 중 《독일군의 소련군 돌파 시도에 대한 방어전술》에서는 1943년 8월 5~24일 동안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독일군의 지연작전을 다루고 있는데 독일군이 하리코프에서 8월 18일에 철수했다고 쓰여 있다. 사실 독일군의 철수 날짜는 8월 23일이었다. 그리고 세계대전기의 공수 작전을 분석한 팜플렛에서는 실제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과 1943년 드네프르 강에서 수행한 대규모 공수 작전에도 소련군이 대규모 공수 작전을 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이런 오류들이 정확한 사실인 양 섞여있으면 자연스럽게 팜플렛 전체의 정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상술한 바와 같이 독일 측의 자료 지배는 많은 문제를 낳았다. 할더와 만슈타인을 비롯한 국방군의 주요 인사들은 그들이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는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패배에 길목에 접어들었을 때는 자세한 서술을 줄이거나 모든 것을 히틀러의 무능과 간섭 때문이었다는 좋은 핑계거리를 사용했다. 그리고 전쟁의 상대였던 소련군에 대한 자료는 부재했으며 후에 교차검증을 하면 무지에 의한 오류나 의도성 있는 오류가 모두 드러났다. 

그리고 이러한 독일 자료의 지배는 서구의 역사서술을 오랫동안 지배했고, 지금도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다. 앨런 클락, 얼 짐케, 앨버튼 시튼 등의 학술적 저작들은 소련측 자료를 제대로 구할 수 없던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독일측의 시선과 입장에서만 군사사를 보고 소련군의 군사행동에 대해 제대로 보지 못하는 편향을 범했다. 존 키건과 앤서니 비버의 대중적 저작들에는 이게 더 노골적으로 반영되었다. 이들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당시 서방 군대들의 소련군을 보는 인식을 투영했고 그것을 기정사실화 하려 했다. 특히 대중에게 영향을 끼친 저자는 폴 카렐이었다. 폴 카렐은 학술적 글쓰기가 아닌 마치 기자가 독일군에 배치되어 전황을 생생하게 보도하는 것 같은 대중적 글쓰기로 독소전쟁사를 기술한 두 권의 책을 저술했고 이는 서구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카렐의 책만 보면 자연스럽게 독일군 지도부의 인식과 행동에 동감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폴 카렐의 정체가 실은 나치당원인 동시에 일반친위대 대원이자 나치 독일의 외무부 대변인이었던 파울 슈미트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슈미트는 독일군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독자를 감정이입 시키며 그 이면에 있던 끔찍한 범죄들을 성공적으로 은폐하는 교묘하고 치밀한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심지어 무장친위대조차도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만드는 저서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서방의 인식에 부합하는 저자는 미국에 망명한 소련군 장교인 블라디미르 레준이었다. 소련군 총참모부 정보총국 출신으로 빅토르 수보로프란 필명을 썼던 레준은 공산당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비효율성, 권력다툼과 암투가 비일비재한 국방성과 총참모부, 능력이 아닌 인맥과 연줄로만 가능한 고위직 승진 등등의 이미 있었던 서방의 고정관념을 재확인시키고 재생산하는 저서들을 출간했다. 그리고 현재는 소련이 1941년에 독일을 선제공격하려 했다는 음모론을 펼치고 있다. 미국 장교단과 안보 싱크탱크들은 펜타곤의 역사를 다룬 미국의 논픽션 작가 제임스 캐롤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충족적 편집증”에 따라 예산을 타내고 예산을 타내기 용이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련군의 전력을 과장하고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는 동시에, 소련군이 실제로는 다양한 약점들 때문에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자기위안들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글랜츠는 “기교 없고, 유연성 없고, 예상 가능한 방법만 쓰는 적이 뛰어나고 유연한 적보다 마주 대하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이 편견들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역사서술 뿐만 아니라 군의 교리에까지 반영되었다. 1970년대 중후반에 미군과 나토군의 교리는 능동방어 교리였다. 이 능동방어를 요약하면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이후로 우크라이나에서 만슈타인이 펼친 기동방어를 모범으로 삼아 공간을 내주며 시간을 벌며 공세를 해 오는 소련군을 깊숙이 끌어들인 뒤에 측방에서 타격을 가하여 소련군을 섬멸한다는 교리였다. 이러한 교리의 탄생에도 국방군의 인물들이 개입했다. 1981년 백악관 국가안보실의 주도로 열린 워게임에 참가한 인물은 독일 기갑부대의 주요 지휘관 중 한명이었던 헤르만 발크였다. 발크는 일전에 자신의 참모장을 역임한 적 있던 멜렌틴과 함께 워게임에서 NATO군 지휘를 직접 맡았다. 워게임에서 발크와 멜렌틴은 서독을 침공해 온 바르샤바 조약군을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벌면서 아군 종심으로 끌어들인 뒤, 취약해진 적 측방을 포위해 섬멸시키고 적을 패퇴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며 미군 장교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능동방어 교리는 결국 비판을 받고 폐기되었다. 능동방어 교리의 문제는 첫째로 서독의 방어종심이 만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벌기에는 너무 좁았다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바르샤바 조약군에 서독 전체가 넘어갈 수도 있었다. 둘째로 능동방어 교리는 소련군에 대판 편견을 반영하고 있었다. 교리는 소비에트 체제의 군대가 기병창을 든 카자크가 되었건, AK-47을 들고 BMP에 타는 차량화 소총병이 되었건 이반은 이반으로 유연하지 못한 존재라는 확신 하에 만들어진 교리였다. 실제 발크가 워게임에서 능동방어를 시연할 때 한 장교가 만약 소련군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이에 발크는 “난 러시아인들이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발크에게는 소련군이 전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도 발전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던 것이다. 군사사를 조금이라고 본 사람은 적이 항상 예상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는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 국방군이 그렇게 효과적으로 싸우고도 결국 베를린이 함락당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가 나왔다. 그 때문에 결국 능동방어 교리는 폐기되었다.

편견의 대중화

학술의 영역에서 나타난 편견은 원래 강했던 대중들의 편견을 통해 더 빠르게 전파되었다. 톰 클랜시, 프레드릭 포사이스, 존 르카레 등의 소설들은 의도적으로 주입된 편견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전후 서구의 대중매체들에서 동부 전선을 다룰 때는 주로 독일군의 입장에서 반영되었고, 그에 따라 동부 전선은 멋진 군복을 입고 나치를 경멸하지만 조국을 사랑하고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는 뛰어난 전사인 독일군이 야만스럽고 인명을 경시하며 우악스럽게 몰려오기만 하는 소련군을 상대한 전쟁이라는 인식이 대중들 사이에서 소설, 보드게임, 만화, 인터넷 팬사이트 등을 통하여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한 편견은 냉전체제와 반공주의의 주입으로 시정되지 않고 훨씬 공고화되었으며, 이는 일본의 대중매체들에도 반영되었다. 비록 소련군에게 만주에서 관동군 전체가 끝장나긴 했지만, 그건 단기간에 경험에 불과했고, 또 만주의 패배에 대해서는 소련군의 군사적 능력보다는 소련군이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으로 깬 행위에 더 초점을 맞춘 일본의 대중들에게서 소련군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그리고 같은 추축 동맹국이자 오랜 선망의 대상인 독일에 대한 애호 감정은 전후에도 계속 대중매체를 통해 나타났다. 

예컨대 유명한 군사 만화가인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들이 있다. 고바야시 모토후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삼을 때 실존인물인 나치 친위대의 미하엘 비트만을 비롯하여 거의 독일군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고바야시가 묘사하는 독일군 인물상은 한결같다. 미남에다가 모든 군복 중에 가장 멋진 군복을 입고, 빛나는 철십자 훈장을 달고, 국가에 충성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멀며 나치즘은 경멸하고, 천하무적에다가 외관까지 멋진 티거 전차를 몰고 무지막지하게 몰려오는 소련 전차들을 상대로 10:1로 싸우는 전사 중의 전사의 이미지로 말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고바야시의 만화에서 소련군은 철저히 독일군 주인공의 멋진 활약에 머릿수만 믿고 몰려오다 무너지는, 앞에서 설명한 이미지의 부합하는 존재로만 나온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만화 <늑대의 포성>이다. 여기서 고바야시는 그린 만화 중 최초로 소련측 주인공인 고르도크를 독일측 주인공인 하겐과 함께 화자로 삼았지만, 그건 이제까지 보여준 고바야시의 독일관과 소련관을 재확인해 시켜주는 인물에 불과하다. 하겐은 미남이고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적을 이기는 긍정적 인물형이다. 그러나 고르도크는 후줄근한 외모에 비합리적인 우스꽝스러운 행동만 하다가 하겐에게 패하는 지극히 희화화된 부정적인 인물형이다. 이러한 인물형의 대비를 통해 고바야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독자에게 주입시킨다. 소련군에 대한 편견 형성과 주입까지는 아닐지라도, 독일군에 대한 감정이입 경향에 대해서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옛날에 그린 단편만화들에서도 크게 벗어나진 않다.

그리고 2013년에 만들어진 일본 애니메이션 <걸스 운트 판저>를 보자. 이건 고바야시의 만화만큼이나 노골적이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소련군을 모티브로 한 학교는 이제까지 형성된 이미지들을 죄다 집합시켜 놨다. 여기서는 제대로 지휘도 못하면서 시끄럽게 소리만 지르는 지휘관과 경직된 지휘에 기계처럼 반응하다 다 잡은 승리도 놓치는 병사들의 이미지가 나온다. 대표적으로 소련군을 모티브로 한 학교의 지휘관은 스탈린에 대한 서방측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다 놓았다. 그게 이 애니메이션 특유의 경박함과 미소녀라는 적절한 포장 요소를 가져다놓긴 했지만, 그 뒤에는 수십 년간 형성된 의도된 편견들이 2010년대에도 수정되지 않은 채, 그리고 어떠한 비판을 거치치도 않은 채 시각적 이미지로 집약되어 시청자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편견을 확대 재생산하도록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냉전 시대적 적대감과 편견을 주입할 정치적 목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고 하면 심한 비약이겠지만, 원래 있던 이미지를 의심 없이 집어넣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인식은 강력한 반공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었다. 당장 우리나라 신문이 50년대부터 소련 붕괴가 멀지 않았다는 희망사항이 다분한 기사를 쓰고 있었고 장준하의 사상계에서도 소련을 단순한 비웃음거리로 삼는 기사를 계속 낼 정도의 반공주의가 만연한 시기를 겪었다. 공산권과의 전쟁경험, 사회통제 목적의 반공주의의 주입, 지속적인 안보위협에 따른 국민의 반공정서 내면화는 우리에게서도 군사사를 보는 눈을 흐리게 하였다. 그리고 아마 같은 공산주의 국가의 군대인 중공군을 상대한 경험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중공군은 한국전쟁에서 서구권 군대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극단적인 전력집중을 구사하였고, 이는 중공군이 엄청난 대군을 운용하고 그 대군을 밀집된 공간 안에 쏟아 붓기만 하는 인해전술을 추구한 걸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결국 같은 공산권 군대인 소련군도 마찬가지라는 인식을 가져왔을 것이다. 국내에 출간되어 시중에 공개된 많은 저작들이 민주화와 한-소 수교 전까지 최소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의 독소전쟁에 대해 아예 다루지 않거나 극도로 간략히만 언급했다. 예컨대 타임라이프 사에서 출간한 39권짜리 2차세계대전사 책에서는 독소전을 단 3권으로만 다루고 있는데 그 중 1943년에서 45년까지 다룬 한 권은 출간되지 않았다. 지금도 볼 수 있는 몇몇 전쟁사 부도 책도 아직도 그런 상태로 출간되고 있다. 또한 이와 별개로 소련에 대하여 의도성이 깔린 조롱과 비난이 유머의 탈을 쓰고 흘러나왔다. 

편견의 학술적 극복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학자들의 연구가 축적됨에 따라,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새로운 틀을 짜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가르도프나 말콤 매킨토시, 피터 비거와 같이 미래의 전장에서 소련군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기 위해 소련군을 편견 없이 연구하는 학자들은 소수지만 이미 50년대 말부터 등장하고 있었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학자인 존 에릭슨은 당시에 모을 수 있던 최대한 많은 러시아어권 자료들을 동서간 해빙과 데탕트 시기에 축적하고 직접 소련으로 가서 당시의 주요 지휘관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의 목적은 적인 소련을 확실히 알기 위한 연구로, 비록 당시의 한계가 있긴 했지만 최대한 편견 없이 소련군을 바라보며 연구 성과를 축적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접어들며 데이비드 글랜츠가 나타났다. 미군 장교로 베트남전 참전 이후 NATO에서 정보장교로 일하고 있던 글랜츠 중령은 정보기관들에서 입수한 소련측 내부 간행물들을 계속 번역했고 이 과정에서 서방의 시각으로 고정된 군사사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지속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1983년에 포트 레븐워스 지휘참모대학 강사로 부임한 글랜츠는 소련 군사사와 군사술, 특히 소련 작전술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학술논문 저술과 강의를 하며 연구성과를 축적했고 제이콥 킵, 브루스 메닝, 그레이엄 터르브빌, 레스터 그라우 등의 자신과 문제의식을 공유한 학자들 및 분석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은 갑자기 대두된 소련의 재래식 전력에 대한 대비 수요가 급증하였고, 또한 베트남전의 패배로 인한 미군의 개혁 과정에서 동구권 군대의 개념인 작전술의 수용 논의가 대두되며 이들의 목소리는 한층 더 힘을 얻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미군은 원래 독일군을 본받아서 능동방어 교리와 능동방어 교리 폐기 이후 1940년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을 모티브로 삼은 공지전 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공지전 교리 또한 한계를 노출시키면서 소련군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미군은 이때 오랫동안 소련군의 개념이자 소련군이 전략과 전술 사이에 억지로 쑤셔 박은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긴 작전술과 작전술적 차원에 대해, 브루스 메닝의 표현을 빌리면 미군은 적국 소련의 “악마의 용어”에 패배했다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미 육군의 훈련과 교리 사령부(TRADOC)는 현재의 미 해외군사연구소인 소련군사연구소(Soviet Army Studied Office)를 창설하고 그 소장으로 이제 대령이 된 글랜츠를 임명하였다. 

글랜츠는 동료들과 함께 러시아어권 자료들을 분석하고, 1986년에는 직접 소련을 방문해 미-소 학자들 간의 군사사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소련 학자들과 교류하고 미국에서 소련 측이 군사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설명했으며, 동구와 서구가 어떻게 군사사에서 이견을 좁히고 접점을 찾을지 활발하게 논의했다. 이제까지 서구권의 자국사 서술을 전부 “부르주아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며 오직 원색적인 비난만 해 왔던 소련의 학자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글랜츠가 편집장으로 활동한 『소련군사연구저널』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으로 이전보다 훨씬 개방된 소련의 학자들까지도 그 성과에 찬사를 바치며 이들에게 소련의 중요한 역사자료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재평가는 결국 미국 고등군사교육 학교에서 소련군의 주요 이론가인 스베친, 투하쳅스키, 트리안다필로프의 저서들에 대한 강의를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면서 절정에 달했다. 미군은 적성국의 군사이론을 연구해 그 대처법을 찾으려는 목적을 넘어서서 그것을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적용하게 된 것이다. 이건 편견의 극복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한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학자들의 연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소련군에 대한 편견과 불가분의 관계인 깨끗한 독일 국방군 전설 또한 무너지기 시작했다. 빌리 브란트의 집권과 동방정책은 오랫동안 독일인들에게 집단망각의 대상이었던 홀로코스트와 나치의 인종범죄들을 수면 위로 부상시켰다. 학술적 수준에서는 독일 국방군이 나치와 무관한 깨끗한 조직이 아닌 나치 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전쟁범죄를 수행했으며 나치와 관계가 없어도 강력한 인종주의와 반민주주의, 반유대주의로 뒤덮인 조직이자 근본적으로 침략지향적인 조직이었음이 드러났다. 학술적 성과의 대중화는 1995년에 관련 문제를 연구한 볼프람 베테, 만프레트 메셔슈미트 등이 주도한 “국방군 범죄 전시회”로 가속화되었다. 전시회는 1998년까지 독일 전국을 순회하며 독일 국방군의 범죄기록, 사진, 명령서 등을 전시하며 깨끗한 독일 국방군의 전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폭로하였다. 극우단체들이 전시회장 밖에서 시위를 벌이고, 참전자들이 전시회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등의 사건이 있었지만,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하여 독일 내에서 더 이상 영광스럽고 명예로우며 기독교 조국을 무신론자들로부터 지킨 국방군의 이미지는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 독일연방군은 국방군 시절의 전통을 더 이상 자랑하지 않는다. 연방군은 기계화학교에 걸려 있던 롬멜과 구데리안의 초상화를 내려버리는 등 당시의 유산들을 청산하며 “제복을 입은 국민의 군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결론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학계에서의 성과였고 아직 우리를 비롯한 서구 대중에게 완전히 전달되진 못하고 있다. 예컨대 세계의 각 전투를 일러스트와 함께 가볍게 다루는 영국 오스프리 출판사의 Campaign 시리즈는 수백 권이 출간되었고 2차 세계대전사도 수십 권을 할당해 다루는데 그 중 독소전은 10권 이하로 다루고 그마저도 3권은 바르바로사 작전만 3권을 할당했다. 서구권이나 일본의 대조국 전쟁을 다룬 많은 만화책들과 게임들, 열거해보자면 <콜 오브 듀티 1>, <콜 오브 듀티: 월드 엣 워>,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등에서는 소련군의 전체주의성과 비인간성을 강조하지 않으면 무슨 매카시 시절의 청문회에 끌려가는 것인 양 그것들을 부각시킨다. 이런 면에서 쉬운 걸 찾는 경향이 있는 독자들은 대조국 전쟁을 균형 잡게 보지 못하고, 오래전에 반박된 한 물 간 주장을 그대로 믿거나, 아니면 소련군에서 비난 소재만 찾아내 우스꽝스럽고 저급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이 편견의 기원이 무엇이며,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으며,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해소되기 시작했는지 살펴보았다. 이건 한 나라와 한 민족과 한 체제와 한 사상과 한 조직에 대한 백년에 가까운 악의의 산물이자, 죄인들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 악의의 근원은 조작된 위서였으며, 제국주의 시대에 생성된 인종주의였다. 그렇게 형성된 편견을 벋어 던지지 못하면, 우리는 군사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계속 왜곡된 시선으로만 보게 될 것이다. 


James Carroll, House of war : the Pentagon and the disastrous rise of American power (Boston : Houghton Mifflin Co., 2006.), 전일휘, 추미란 역, 『전쟁의 집 : 펜타곤과 미국 패권의 비극』, 동녘, 2009.
Edward J. Drea, Nomonhan: Japanese-Soviet Tactical Combat, 1939, Leavenworth Paper No 2, (Kansas: Fort Leavenworth, 1981)
David M. Glantz,, Soviet Offensive Ground Doctrine Since 1945:historical overview (Air University Review, 1983 March-April)
David M. Glantz, American Perspectives on Eastern Front Operations in World war II (Fort Leavenworth, Kansas: SASO, 1987)
David M. Glantz,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the Hitler, (Kansas: University of Kansas Press, 1995), 권도승 외 3인 역, 『독소전쟁사』, 열린책들, 2007
David M. Glantz, The Red Army at War, 1941-1945: Sources and Interpretations , in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62, No. 3 (Jul., 1998)
Jacob W. Kipp, Operational Art and the Curious Narrative on the Russian Contribution: Presence and Absence Over the Last 2 Decades, in Stephen Blank ed, The Russian Military Today and Tomorrow: Essays in Memory of Mary Fitzgerald (Military Bookshop, 2010) 
John. J. Mearsheimer, Liddell Hart and the Weight of History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88), 주은식 역, 『리델하트 사상이 현대사에 미친 영향』, 한국전략문제연구소, 1994.
Bruce W. Menning, “Opreational Art’s Origin”, in Michael D. Krause and R. Cody Phillips ed, Historical Perspectives of the Operational Art,  (Washington D.C.,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2005), 
Dennis E. Showlter, A Dubious Heritage: The Military Legacy of The Russo-German War (Air University Review, 1985 March-April)
Ronald Smelser and Edward J. Davies II,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Popular Cultur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Wolfram Wette, Die Wehrmacht: Feindbilder, Vernichtungskrieg, FISCHER Taschenbuch Legenden (Fankfruit am Main: 2002) 김승렬 역, 『독일 국방군: 2차 대전과 깨끗한 독일군의 신화』 마지북스, 2011.
백준기, 『유라시아 제국의 탄생: 유라시아 외교의 기원』, 홍문관, 2014.
류한수, 「독일 영화 “Stalingrad”와 미국 영화 “Enemy at the Gates”에 나타난 스탈린그라드 전투」, 『상명사학』 13/14집.
황동하, 「냉전기 한국 지식인의 소련 인식: 반공 이데올로그의 저작을 중심으로」, 『아시아문화연구』, Vol.19.

핑백

덧글

  • RNLAF 2016/04/30 22:35 # 삭제 답글

    간만에 글 잘봤습니다.
  • 진보만세 2016/05/06 09:42 # 답글

    여러모로 바쁘실텐데, 심혈을 기울여주신 연재 글월에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소련 군사사에 관해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