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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활발발한 성리학을 위하여> 기타 역사

* 원 출처인 수유너머 구로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없는 관계로 출처 제시를 하지 못하는 점을 양해드립니다.



1) 어떤 추억

이옥강좌 첫 시간처럼, 처음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름이 ‘오항녕’이라고 했더니, 여기저기서 감응이 왔습니다. 마치 우리들의 첫 시간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내년에 육학년으로 진급하기로 하고, 이번엔 전공소개를 했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거짓말 안 보태고 ‘싸아-’한 분위기가 감돕니다. 조금 전 곧 친해질 듯한 분위기는 단번에 사라집니다. 우호 대상에서 경계 대상으로의 전환! 성리학은 우리에게 뻑뻑하고 거리감이 있는 그 무엇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저는 한 마디 보탭니다. “성리학을 공부한 뒤로, 잘 놀고, 술도 좋아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려고 하고, 또, 무엇보다 여자도 좋아합니다. 한마디로 좀 사람이 돼 간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면, 저의 진술에 다들 당황하십니다. ‘에헴’ 하면서 수염을 쓰다듬어야 하는데, 놀기, 술, 여자, 공부, 뭐 이런 말을 하니까 영 매치가 안 되는 거지요. 그동안 제가 배운 성리학과, 우리에게 표상되는(재현되는^^) 성리학의 괴리입니다.

 

2) 성리학의 '재현'에 대하여

즉, 성리학은 도덕, 윤리, 법칙, 권위 등으로 우리에게 재현됩니다. 흥미로운 일입니다. 무언가의 성리학, X라는 성리학이 있는데, 그 X가 바로 그 용어=시니피앙으로 재현되는 것이지요. 예전에 이 시기 서술을 보면,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극복한 실학은…운운’ 하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바로 그 ‘성리학적 지배질서’가 바로 X에 해당됩니다.

 

당시 연구를 시작하던 초학자로서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 X가 뭔지 학계에서 정리되지도 않은 상태로 위와 같은 용어에 의해 성리학이 규정된 것으로 ‘치고’, 그 성리학을 극복하는 '실학' 내지 내재적 발전론(자본주의 맹아론)이 논의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리학자들이 쓴 역사저서의 성격을 두고 ‘도덕 사관, 도덕적 포폄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표상’을 깨는 데 꼬박 책 한 권을 써야 했습니다.(‘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이라는 책입니다. 이 문제는 일단 생략합니다.)

 

얼마 전, 아내가 교과서를 집필하면서 배당받은 집필 꼭지가 바로 ‘조선전기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확립’이란 꼭지였습니다. 조선전기는 ‘성리학적 지배질서’가 확립되지도 않았고, 왜 ‘성리학’이 ‘지배질서’와 짝을 이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세조부터 명종까지, 성리학자들은 줄창 깨지고 죽기에 바빴거든요. 다 아는 4대 사화입니다.) 저는 제목이 이상하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달리 대안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교과서는, 안타깝고 답답하지만, 학계의 연구수준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성리학의 ‘재현’을 문제 삼는 이유는, '앞으로의' 연구, 논의의 방향을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3) 오해와 이해

지난번에 강명관 교수의 관점에 대해 다소 거칠게 표현한 듯해서 죄송합니다. 2007년도 책을 보니, 근대 국어/국민(민족)의 형성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내셨더군요. 제가 비판하던 실학/내재적 발전론이라는 근대주의 인식틀이 가진 문제점도 충분히 고찰하고 계시구요. 그런 점에서 제가 좀 오해를 한 듯합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셈이지요. 그렇지만 좀 이상한 게, 최근 한겨레신문에서 몇 번 글을 보았는데, 좀 언발란스가 있는 듯합니다. 이전의 실학론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거든요. 왜 그랬을까요?

 

아마 여전히 성리학 또는 성리학의 시대를 비껴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처럼, 성리학이 아닌 다른 무엇에서 시대의 동력을 찾는 게 아닌가 합니다. 기존 실학연구자들처럼 성리학을 X로 표상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지요.

저는 성리학의 키워드는, 중용(中庸)과 민(民)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용은 우주의 생명력을 위한 구상이지요. 중용은 생명의 건강, 세계의 균형입니다. 사회적으로는 민의 안정이 가장 큰 관심이 됩니다.(조선 태조의 즉위교서에 나오는 첫 마디지요. 마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처럼.)

 

건강한 몸으로 제대로 웃고(상갓집에서 웃지 않고), 화낼 때 화내고(용산 참사를 보고도 데면데면하지 않고!), 사랑할 때 사랑하고(대신 강의 빠지지 말고.), 겁낼 때는 겁내고(급류에 장비도 없이 사람 구하러 뛰어들지 말고.) 등등. 상황에 가장 적절한(時中) 몸을 훈련하는 것, 그래서 크게는 천지에 가득 찬 호연지기를 키우고, 가까이는 자식, 친구를 아낄 줄 아는 내공을 갖추는 것. 대충 이렇게 저는 성리학을 이해합니다. 실제로 생각보다 훨씬 ‘근대 남자들’보다 성리학의 시대를 살았던 남자들이 잘 웁니다. 술도 잘 마십니다. 친구가 오면 너무 반가워합니다. 그러다보면 체질이나 사주에 따라 여자를 밝히는 지경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들의 시(詩)를 제가 새롭게 보는 이유입니다.

사단칠정 논쟁은 한 마디로 생명력이 넘치는 인간,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사는 인격을 향한 논쟁이었고, 인물성동이 논쟁은 그런 사상의 우주적 전개였던 것이지요. 일상부터 우주까지 활발발한 존재들이 넘쳐나는 세상, 그것이 성리학의 꿈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때론 너무 어깨에 힘주는 듯한 책임감부터, 꽃을 가꾸는 섬세함까지 포괄될 수 있습니다. 각기 그릇에 따라, 내공에 따라.

 

4) ‘재현된 성리학’의 해체를 위해

한때 발랄했던 어떤 학자가, 자신은 조선 유학의 ‘기본 의미’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지성사에는 관심이 없다고. 그러더니, 조선 유학이 근대로 가지 못하고 ‘실패’했다며, ‘자책’하는 걸 목격했습니다. 지성사에 관심이 없다는 그 안이함의 결과가 결국 '제일 시시한 시각’을 채택하게 되고, 자책으로 이어지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성사는 바로 ‘배치’를 보는 작업일 것입니다. ‘배치’를 역사학의 상투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역사적 접근, 역사적 맥락이라고 부릅니다.(‘역사적’이란 말의 복잡성은 다시 논의하지요. 일단 저는 문제현실과 체계성의 두 축으로 봅니다.)

 

그걸 게을리 하다 보니, 공연히 지지 않아도 될 부담을 지고 자책하는 것이지요. 누가 자책하라고 했나요? 자기가 한일합방서에 서명이라도 했나요? 가끔 지식인은 이렇게 웃깁니다.(사카이 선생도 이토오 진사이가 ‘읽은 주자’, 즉 X를 가지고 주자와 다른 진사이의 사상을 설명하면서, 비슷한 말을 하지요. 나는 ‘역사적 접근’을 시도하는 게 아니다, 라고. 그 X가 흥미롭게도 우리가 가진 표상 X와 참 흡사합니다. 주자가 들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명백한 왜곡’까지도 포함하여. 이 문제는 따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저의 인상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채운 선생님의 말씀대로 ‘배치’가 중요합니다. 뭔가 이데아=X=‘대문자 성리학’이 있어서 그게 재현되는 게 아니라, 바로 나타나는 그것, 현실에 역사에 나타나는 그것이야말로 ‘원래 그것’이라고 착각했던 실재라는 것이지요. N개의 성리학이 있는 거지요. 이렇게 보면, ‘성리학과의 단절’을 찾는 답답한 관점이 아닌, ‘연속과 단절’이라는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조선 사상계를 관찰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마광, 이정과 주자, 양명이 놓인 배치(역사적 상황)가 있고, 퇴율, 우암, 성호, 다산이 놓인 배치가 있는 것입니다. 각자 서로 ‘나름의 성리학’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정조와 이옥도 그렇지요. 종종, '주자가 다시 태어나도 내 말을 옳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주자가 아니다'(즉, '난 내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다', '난 쭉 내 식대로 생각할 거다.')는 표현들이 그 N개의 성리학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옥의 ‘讀朱子’를 보며, 그 글이 주자를 비튼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이것저것이 스며들고, 변형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이옥의 해석입니다. N개 중의 하나. 그러다 어느 날 보면, 너와 나의 성리학이 너무 다르다, 이렇게 되겠지요? 문체반정은 그런 상황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옥에게서 '난만한 성리학'을 봅니다. 그리고, 아, 새삼 성리학이 얼마나 성긴 그물인가를 봅니다.

 

강의를 들으며, 저의 인식 지평이 훤해지는 걸 느낍니다.

변곡이 아니라, 고양입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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