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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이글루는 소련군 작전술의 발전사 연재와 그 참고 문헌들을 번역해 업로드하는 것을 중점으로 삼을 것입니다. 

2. 본 이글루는 대조국 전쟁(독소 전쟁)은 데이비드 M. 글랜츠를, 조선사는 오항녕 교수의 역사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3. 본 이글루는 상당히 소련 편향적인 자료가 많이 올라올 것이고 주인장의 내공이 부족하여 다른 이름 있으신 분들의 피드백이 필수적일 것이라 올라오는 글들을 곧이 곧대로 믿으시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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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본 이글루는 대륙견공과 환국신민 파시스트들을 사절합니다. 








6. 본 이글루는 소련 편향적이지만 위와 같은 선생들도 사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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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전선의 신화: 미국 대중문화의 독소전쟁-4(끝) 동부전선의 신화

베트남전 이후


이 회고록들, 대중 역사책들, 그리고 전쟁소설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강력한 선점효과를 낳았다. 이 책들의 대중성은 절대로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고, 베트남전 동안 배경으로 남았다. 미국의 군사 및 정보기관의 최고위 인사들은 아시아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독일 국방군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독일군의 대소전은 동남아시아의 정글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1974년에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자, 우리가 패배한 원인에 대한 의문이 부상했다. 대규모 교전에서 항상 승리하고 구정 공세에서도 프랑스군이 디엔 비엔 푸(Dien Bian Pu)에서 겪은 패배와 같은 심각한 패배를 당한 적이 없던 미군이 어째서 분열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부상했다. 어째서 미 육군에는 응집력이 없었는가? 어째서 군기가 그렇게 무너졌는가? 어째서 미군 병사들은 균형을 잃을 정도로 술과 마약에 취하고, 탈영하고, 상관을 살해했는가?


미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 씨름하다가 독일 국방군을 재발견했다. 한 독일인 관찰자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군사 문건에서 위기의 순간에 독일 국방군의 경험이 참고자료가 되는 때는 위기의 시기를 반영했다."1 1940년대 말에 독일 장군들은 미국인들에게 깨끗한 국방군의 신화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인 미군은 패자인 독일군을 모범으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이제 베트남전이 끝나가자 미군은 독일군을 모범으로 삼았다. 독일군의 동부전선 및 다른 전선의 경험이 미군에게 군기, 동기부여, 응집력, 인내력, 그리고 전투력을 가르쳐 줄 수 있었는가? 이는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의 우리의 관심이 냉전 중인 유럽에서 러시아와 대규모 충돌을 한다는 가능성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충돌이 발발한다고 가정하면, 미군은 중요한 개혁을 해야 했다.


그 결과 미국의 정부기관들, 특히 국방부는 독일군과 미군을 비교하거나 독일군 자체만을 연구하는 여러 연구회들을 개최했다. 게다가 전직 국방군 장성들이 미군과 독일연방군 양쪽에 다시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한 학자는 익살스럽게 말했다. “세계대전 이후의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당황한 군사 개혁자들은 사회과학, 게임이론, 에너지공학을 연구하거나 경영대학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이러한 당시의 당황을 반영하는 또 다른 것은 독일군의 특별한 역사에서 경험이 관련사례일 뿐만 아니라 모범사례로 떠오르는 예상 못한 문제였을 것이다.”2


연구자들은 시작부터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비슷한 연구를 들여다보았다. 1948년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 육군 정보참모부에서 근무한 에드워드 A. 실즈(Edward A. Shils)와 모리스 재너위츠(Morris Janowitz)는 독일 군인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었는지를 연구한 유명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저자들은 독일군이 소대나 중대 수준에서 “특정한 주요 개인의 필요”에 만족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 육군은 부대를 최대한 기존 인력으로 편성하려 했고, 이는 부대 재편성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통해 장교와 병사들 사이에 높은 수준의 지휘력을 유지하고, 인력이 교체되어도 새로운 인력이 부대에 빠르게 적응하며, 장교들이 병사들에게 군기와 배려를 복합하여 적용하게 하였다. 병사들은 그들의 부대를 “대가족”이라고 보았다.3


충분히 흥미롭게도 당시의 연구는 독일군의 나치 이데올로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이는 1974년 이후의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보고서의 저자들과 그 독자들, 그리고 미국의 서브컬쳐 향유자들은 독일군을 정치적, 전략적, 또는 이념적 맥락에서 벗어나 “낭만화”하고 계속해서 추양해 줄 수 있게 만들었다.


19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의 연구는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기의 독일군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를 보여준다. 그 중 하나는 리처드 A. 개브리얼(Richard A. Gabriel)과 폴 새비지(Paul Savage)가 실즈와 재너위츠가 30년 전에 내린 결론과 동일한 결론을 내린 연구였다. 그들이 해답은 이러했다. “독일군의 전장 응집력은 개별 병사들이 기본 집단인 분대, 소대, 그리고 중대를 존경하면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의 직접적인 결과이자 직속상관과 부사관이 명예로운 사람으로서 병사들에게 존경받을 만할 가치가 있으며 병사들을 잘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었다.”4 다시 말하면, 독일군은 장교들을 매우 신중히 선택했고, 장교들은 병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병사들과 같은 위기를 겪었다는 것이다. 독일 장교들은 부대를 하나로 유지하고, 가끔 전방의 사단을 후방으로 보내 계속 부대를 유지시키며 시간이 지나도 소속 부대에 대한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게 하였다. 독일군은 또한 병사들에게 성공의 대가로 많은 훈장, 메달, 그리고 포상을 내려 주었다.5 이 연구에서도 나치 이데올로기는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독일군을 찬양하는 다음 연구는 이스라엘의 역사가에게서도 나왔다. 마틴 반 크레벨트(Martin van Creveld)는 1980년에 낸 그의 보고서에서 다른 연구들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독일군, 특히 독일 장교단은 장교단의 질을 달성하기 위해 씨름해서 항상 최고의 인력을 전선으로 보내 후방을 상대적으로 약하게 유지했다는 것이다. 크레벨트는 전투력 문제에 대한 보고서 서문에서 독일군에게 찬사를 바쳤다.


“역사가는 3:1, 5:1, 또는 7:1의 열세의 (중략) 군대에 직면한다. 하지만 그 군대는 도망가지 않는다. 무너지지도 않는다. 상관을 살해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치열하게 싸운다. 그 군대는 히틀러의 전쟁에서도 독일에서 진정으로 인기가 많았다. 그 군대는 후방의 조국이 폭격당해 산산조각나도 싸웠다. 그 군대는 많은 장군들이 (중략) 최고사령관을 광인으로 취급했다. (중략) 하지만 그 부대들은 원 편제의 20% 수준으로 축소되어도 계속 존재했고 저항했다. 이런 성과는 어떤 군대도 거둔 적이 없었다.”


크레벨트의 연구는 독일군을 빛나는 별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미 육군과 불쾌할 정도로 비교시켰다.6 충분히 흥미롭게도, 크레벨트는 이후 다른 역사가들과 함께 동유럽에서 히틀러의 인종절멸전쟁에 밀접히 협력한 독일 국방군에게 아부의 극치를 보내는 논평을 계속했다. 1999년에 크레벨트는 논문집으로 출간된 책에서 쓴 논문에서 독일 국방군이 “주도권과 군기를 이전의 어떤 근대 군대보다 훌륭히 복합시켰으며 전쟁 시작부터 놀라운 전술적 능력 및 작전술적 능력을 보여주어 거의 전설이 되었다.”7라고 썼다.


마지막으로 T. N. 두푸이(DuPuy) 대령은 결단력 있는 군사개혁가인 동시에 독일군을 큰 목소리로 찬양하는 사람으로 『전쟁천재』(A Genius for War)라는 제목의 책에서 독일군 총참모본부의 역사를 다뤘다. 두푸이는 독일군 총참모본부가 군사적 천재와 탁월한 인사를 만드는 제도적 틀이며 군사사의 연구를 고무시켰다고 추양했다.


두푸이는 독일군이 1944년에도 적보다 전투효율이 20% 정도 앞섰으며 적에게 2배에서 3배의 사상자를 강요했다고 보고했다. 두푸이는 연구에서 복잡한 수학계산 모델을 사용하긴 했지만, 자신이 취한 태도에 어떠한 의심도 없었다. “독일군이 1944년 중반에 겪은 재앙을 회복한 일은 ‘기적’으로 부를 만할 가치 이상이 있으며 다른 군대에서 찾기 어려운 군사적 성과를 이루어 냈다. (중략) 하지만 한번 기회가 있을 때 총체적 패배 상태에서 이러한 놀라운 회복을 이룬 군대를 찾기 힘들다. 이에 비견될 만할 역사적 사례는 찾기 힘들다.”8 두푸이는 여기서도 이념적, 정치적, 전략적 요소는 무시했다.


미 육군은 개혁 과정에서 문서나 사회과학 및 심리학적 모델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생존해 있는 국방군 장성들을 불렀다. 베트남전에서 사단장을 역임한 윌리엄 드푸이(William Depuy, T. N. 두푸이 대령과 헷갈리지 말 것) 대장은 미 육군의 모든 교육훈련과 야전교범의 작성을 담당하는 훈련교리사령부(Training and Doctrine Command)를 직접 조직했다. 드푸이는 정보를 얻기 위해 독일군 장성들을 불러 전쟁 말기의 방어전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더 의미 있는 것은 독일군이 러시아군을 스탈린그라드 전투부터 제2차 세계대전 말기까지 러시아군을 상대한 경험이었다. 독일 육군은 2년 반 동안 300만명의 병력으로 550만의 러시아군을 상대로 전략적 방어전을 치렀다. (중략) 서유럽의 어떤 군대도 독일군만큼 경이적인 크기의 전설적인 전투들을 치른 경험이 없었다. 독일군의 행동은 이런 상황에서도 기적과도 마찬가지였다.”9


당시 두푸이는 미국으로 두 전직 독일군 장성을 초빙해 왔다. 미군이 독일의 조지 S. 패튼으로 보던 헤르만 발크(Hermann Balck) 기갑대장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기갑전투』(1956)의 저자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장군들』(German Generals of World War Two, 1977)의 저자인 F. W. 폰 멜렌틴 소장이었다. 멜렌틴은 이전에 자신의 상관이었던 발크를 “확고부동한 결단력 - 군에서 높은 재능을 가진 지휘관”으로 묘사하며 그에게 아부했다.10 두 독일인은 1980년 5월에 워싱턴에 와서 고위급 장교들과 만나 제2차 세계대전기에 러시아군을 상대한 전술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그 전술이 NATO에도 유용할 거라고 보았다. 발크는 1942년 겨울에 치르(Chir) 강에서 제11 기갑사단을 지휘하며 소련군의 대공세를 적은 손실만 입고 유연/기동 방어로 대응한 작전으로 유명했다. 여기서 발크는 미국인들을 가르쳤다. 두푸이 대령을 비롯한 미군의 고위급 장교들은 발크의 강의를 경청했다. 두푸이는 이렇게 썼다. “발크 대장은 워낙 간결하게 말해서 무뚝뚝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매우 사려 깊은깊은 사람이었다. 발크는 확실히 강철의 의지와 강철의 신경을 가진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런 사람이다. 발크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독일군 및 독일 군인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을 표출한다. 발크는 독일군이 러시아군보다 우월하다는 데 의심을 품지 않는다. (중략)” 폰 멜렌틴 소장은 외견상으로는 다른 장교들보다 더 신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멜렌틴의 기록과 발크의 멜렌틴에 대한 존중은 그 또한 몸속에 강철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이 두 독일인은 미국인들에게 자신의 오랜 문화적 편견을 전달해 주었다. 멜렌틴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인들은 예측불가입니다. 오늘은 종심 깊이 공격하는 영웅처럼 보이지만 내일은 완전히 겁을 먹어서 아무것도 안하려고 들죠. (중략) 우리를 믿으세요. 그들은 집단이지만 우린 개인입니다. 이게 러시아 군인과 유럽 군인의 차이죠.” 누군가 러시아 군인이 더 교육을 받거나 서구 사상에 노출되어 변화했을 가능성을 묻자, 발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또한 미국인들이 모방하려 애쓴 기동방어와 하급 지휘관들의 독립성에 대한 제2차 세계대전의 사례를  구변 좋게 말해 주었다. 세미나 마지막 날에 독일 육군과 미 육군의 비교 결과는 불명해 보였다. “독일군 지도자들은 전투 전술에서 미군의 동급 장교들보다 더 수준이 뛰어났다.” 그들은 미군이 독일군에게 필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발크 장군과 폰 멜렌틴 장군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완벽함과 우월한 행동은 청중들을 그들의 지시에 쉽게 따르게 하였다.”11


그들의 많은 조언이 새로운 야전교범 100-5(1982)에 반영되었다.12 하지만 미국인들은 그 성과를 천천히 흡수했다. 미군은 워게임에서 바르사뱌 조약군의 침략군을 너무 전방에서 상대해 무너졌다. 두 독일 장군은 서독 깊숙히 후퇴한 뒤 러시아군의 양측익을 공격해 이겼다.13 멜렌틴은 1년 후에 NATO의 방위 전망을 담은 중요한 저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한 독일군의 방어 전술을 강조하고 있다.14


이 연구들의 결가는 미 육군에 스며들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군사잡지에 관련저술이 크게 늘었다. 독일의 군인이자 지식인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크게 재조명되어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에서 그의 저작을 가르치는 교육과정이 생겼다. 클라우제비츠에 대한 많은 논문들이 군사잡지에서 나왔고, 150년이 된 그의 유명한 격언인 전쟁은 정치의 연장은 미군의 베트남전 실패를 해석해 주었다.15

다른 논문들은 독일의 위대한 군인들, 특히 독일군 총참모본부의 참모총장들을 추양했다. 그 중에 가장 언급이 많이 되는 인물로는 헬무트 폰 몰트케와 1920년대에 독일군을 현대화시킨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가 있었다.16여러 논문들이 독일군의 작전술적 기술을 다른 군대와 비교했으며 이 중 거의 모든 논문들이 독일군의 명성을 계속 유지시켰다.17


독일군에 대한 긍정적 관점과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관점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학자들은 독일 국방군이 상상하는 것만큼 훌륭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독일군의 초기 승리는 그들보다 더 약하고 잘못 지도된 군대를 상대로 거둔 것들이었고, 독일군의 정보력은 구제불능이었으며, 독일군의 계획수립은 부적절한데다가 잘못된 가정에 기초하고 있었고, 대부분 우마차에 의존한 독일군의 수송은 원시적이었으며, 각 부서간 적대감정이 심했고, 그리고 대중적인 믿음과 달리 국방군은, 특히 초급 장교들이 확실히 나치화되어 있었다는 논문들이 나왔다.18 다른 학자들은 임무형 지휘같은 독일군의 개념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의 의미에서 벗어나 있거나 제대로 된 이해를 받지 못했으며 이는 독일군의 경험에서 미군이 배울 수 있는 게 훨씬 적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는 독일군의 전쟁 초기 성공이 교리의 우월함 때문이 아니라, 그런 교리가 없었기 때문임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독일군은 자신들이 거둔 성공의 수준에 스스로가 놀라기까지 했다.19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소수의 관점으로만 남았고 독일 국방군이 우월한 전투력이라는 관점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크레벨트는 그러한 비판, 특히 보몬트(Beaumont)와 휴즈(Hughes)의 비판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독일 국방군은 야전군에서 최고사령부 수준의 모든 약점에도 역사에서 최고의 전투기계였으며 20세기의 어느 군대보다 더 훌륭했다.” 다른 저자들은 독일의 대소전을 “잊힌 전쟁”으로 특별히 언급하며 미군이 독일군의 경험을 통해 적에 대해 배워야 한다고 언급했다.20


독일 국방군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지배했고 군에 침투했을 뿐만 아니라 워게임 플레이어, 리인액터, 수집가,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 회원 등의 대중에 침투하였다. 실제 독일 국방군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열광은 독일군을 문화에서 이전보다 더 “낭만화”시켰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지식이 광범위하게 퍼졌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낭만가들은 홀로코스트를 대부분 무시하고 “깨끗한” 국방군의 낭만화를 계속 따르고 있으며 인터넷 기술의 등장으로 낭만화의 힘과 강도가 더 커졌다.


미국인들이 독일군과 독일군의 지도자들을 어느 정도로 보고 있는지 보여주는 구술 증거가 있다. 베르너 R. 카슨(Verner R. Carlson) 중령은 폰 멜렌틴의 책 『기갑전투』를 읽고 충격을 받아 “훌륭하게 저술된 책”이라고 평하고 그를 인터뷰하러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갔다 멜렌틴은 그곳에서 칼슨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그 결과 칼슨은 『군사평론』에 멜렌틴을 찬사하는 기사를 썼다. “그가 과거의 저투에 대해 일어날 때, 그의 청색 눈동자는 먼 곳에 초점을 두었다. 흡사 그가 전투의 최전선에서 계속 소련군 전차들의 접근을 관측하는 것처럼 말이다.” 카슨은 멜렌틴의 동부전선 경험을 듣고 기록했다. 확실히 세련되고 매력적인 멜렌틴은 카슨에게 1950년대의 독일 장군들이 그랬던 것처럼 효과적으로 마법을 걸었다. 멜렌틴은 품위 있고, 귀족적이고, 겸손하고, 강건한 사람이었으며 카슨은 그가 본 전쟁과 롬멜, 구데리안, 발크와 같은 옛 전우들에 대해 말한 모든 것에 큰 가치를 두었다. 카슨은 전쟁에 참전한 독일군 장성들 중 3분의 1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카슨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멜렌틴은 패배와 감옥 생활에도 정신이 무너지지 않았다. 멜렌틴은 매일 아침마다 2시간 동안 승마를 하고, 책상에서 매일 8시간 일하며 무보수로 다양한 문제를 관대하게 상담해 준다. 멜렌틴은 한 달에 한 번 30명의 가족들과 다 같이 저녁을 먹는다. 멜렌틴은 NATO의 기동연습을 참관하거나 NATO 및 육군대학에서 연설할 일이 있으면 최대한 참석한다.”21


이런 독일군을 추양하는 인터뷰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고위급 장교들은 계속해서 독일군 참전자와 인터뷰를 하는 과정을 거쳤다. 2005년에는 “히틀러 군대의 기마병”이라는 제목의 인터뷰 모임이 있었다.22


<워싱턴 포스트>는 <맨체스터 가디언 위클리>(Manchester Guardian Weekly)의 기사 “국방군은 훌륭한 군대였다.”라는 기사를 다시 게재했다. 이 기사에서 독일군은 “모든 상황에서 영국군과 미군에 50% 이상의 손실을 강요했다.”라고 서술되었다.23


구데리안의 손자 귄터 구데리안 독일연방군 중령은 1990년대 중반에 포트 브래그(Fort Bragg)에 연락장교로 파견되었다. 귄터 구데리안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끔 저는 독일군보다 미 육군에서 구데리안의 이름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점에 감명을 받곤 합니다.” 귄터 구데리안은 미 제7 군단의 연락장교로 근무할 때 일어난 일을 말해 주었다. 그는 군단 작전과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두 벽에 두 큰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는 패튼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 할아버지였습니다.”24


미 공군의 알렉산더 B. 로버츠(Alexander B. Roberts) 중령은 1944년에 "뛰어난 공군의 핵심 가치: 리더십의 도전:에서 독일군의 전 대장 귄터 블루멘트리트를 인용해 지식은 중요하지만 그것에서 개성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25


케블라제 방탄모는 미 육군에 도입되었을 때, 이 방탄모는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왜냐하면 그 형태가 제2차 세계대전기 독일군의 철모를 닮았기 때문이었다.26


이 이야기들은 빙산의 일각이고 독일 국방군의 낭만화가 미군에서 모든 수준에 침투해 있고 그것이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미국 대중문화에서 영구히 지속시키는 틀이자 원천임을 보여준다. 베트남전 이후의 국방군의 재조명은 대중 역사책들, 워게임, 인터넷 채팅방, 그리고 리인액트먼트의 틀을 제공해 주었다. 이것들은 이후의 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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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laus Naumann, "Godfathers of the Innere Fuhrung? German_American Interaction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Bundeswehr," 저자의 호의로 받은 미출간 원고, p. 13을 참고할 것.
  2. David Schoenbaum, "The Wehrmacht and G. I. Joe:Learning what from History?" in International Security 8 (1983), p. 202.
  3. “Cohension and Disintegration in the Wehrmacht in World War Two," in public Opinion Quarterl, XII (1948), pp. 202, 285, 298.
  4. Crisis in Command. The Mismanagement in the Army (New York, Hill and Wang, 1978), p. 34.
  5. Ibid., pp. 34-36.
  6. Fighting Power. German and U.S. Army Performance, 1939-1945 (Westport, Conn., Greenwood Books, 1982), p. 5.
  7. "Die deutsche Wehrmacht: eine militarische Beurteilung," in Rolf-Dieter Muller/Hans-Erich Volkmann (eds0< Die Wehrmacht. Mythos und Realitat (Munich, Oldenbourg, 1999), pp. 333-38.
  8. A Genius for War. The German Army and General Staff, 1807-1945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1977), pp. 5, 295.
  9. Uwe Heuer, Reichswehr-Wehrmacht-Bundeswehr. Zum Image deutscher Streitkrafte in den Vereinigten Staaten von America. Kontinuitat und Wandel im Urteil amerkanischer Experten (Frankfurt, Peter Laong, 1990). 이 책은 광범위한 미국 자료를 사용하여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독일군에 대한 태도변화를 보여주는 가치있는 연구다. 두푸이의 글은 p. 352에서 인용했다. 또한 341-44에서 드푸이는 자신의 제2차 세계대전 경험에서 독일군을 존경하고 있다. 드푸이는 노르망디에서 제90 보병사단 소속으로 참전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사단에 있었다. 드푸이는 특히 독일군이 신중하게 구축한 진지와 방어구역 및 차량을 돌격포로 활용하는 능력과 제압사격 및 화기 진지배치에 찬사를 바쳤다. William DePuy, Romie Brownlee and William Mullen, Changing an Army: And Oral History of General Wiliam E. DePuy, USA Retired (Carlise Barracks, PA and Washington, DC< U.S. Military Institute and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86).
  10. F.W. von Mellenthing, German Generals of World War II: As I Saw Them (Norma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77), p. 189.
  11. 두푸이가 쓴 보고서 General Balck and von Mellenthin on Tactics: Implications for NATO Military Doctrine (Maclean, VA., BDM Corporation, 1980), pp. 10-13을 참고할 것. 인용문은 p. 21에서 가져왔다. BDM 코퍼레이션은 CIA와 기술계약을 체결한 회사로 이 회의를 주선했으며 워게임 기술지원을 제공했다.
  12. Heuer, pp. 341-44, 352ff를 참고할 것. 특히 p. 75, fn. 103을 참고할 것.
  13. 윌리엄 S. 린드(William S. Lind)가 저자에게 들려준 일화.
  14. R. H. S. Stolfi, Nato Under Attack. Why the Western Alliance Can Fight Outnumbered and Win in Central Europe Without Nuclear Weaons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1984).
  15. Heuer, pp. 379-80. 예를 들어 William B. Pickett, "Eisenhower as a Student of Clausewitz" Military Review 65 (July 1985), pp. 22-27; and Steven J. Argersinger, "Karl von Clausewitz: Analysis of MF 100-5," Military Review 66 (February 1986), pp. 68-75.
  16. Col. Michael D. Krause, "Moltke and the Origins of Operational Art" in Military Review 70 (September 1990), pp. 28-44; and Lieutenant Col. Laurence R. Sadoff, "Hans von Seeckt. One Man Who Made a Difference," Military Review 67 (December 1987), pp. 76-81.
  17. 예를 들어 Major George A. Higgins, "German and US Operational Art: A Contrast in Maneuver" in Military Review 65 (October 1985), pp. 22-29; Lieutenant Colnen Paul Tiberi, "German verus Soviet Blitzkrieg", Military Review 65 (Septmebr 1985), pp. 63-71; Major Stephen T. Rippe, "Leadership, Firepower and Maneuver: The British and the Germans,: Military Review 65 (October 1985), pp. 30-36; Major Glen L. Scott, "British and German Operational Styles in World War II," Military Review 65 (October 1985), pp. 37-41; Captain Peter R. Mansoor, "The Second Battle of Sedan May 1940," Military Review 68 (June 1988), pp. 65-75을 참고할 것.
  18. 로저 A. 버몬트가 『군사평론』에 기고한 "On the Wehrmacht Mystique" 66 (July 1986)과 "Wehrmacht Mystique' Revisited" 70 (February 1990), pp. 64-75를 특히 참고할 것.
  19. Daniel J. Hughes, "Abuses of German Military History," Military Review 66 (December 1986), pp. 66-75; and Captain Antulio J. Echevarria II, "Auftragstaktik: In Its Proper Perspective," Military Review 66 (October 1986), pp. 50-56.
  20. "On Lerning From the Wehrmacht and Other Things," Military Review 68 (January 1988), p. 69; Captain Micheal Phipps, "A Forgotten War," Infantry (November-December 1984), pp. 38-40.
  21. "Portrait of a German General Staff Officer," Military Review 70, no. 4 (April 1990)의 각각 pp. 70과 81에서 인용.
  22. Roger Steinway in Military History, February 2005, pp. 34-41 스테인웨이는 텍사스의 고등학교 교사다. 그는 스테판 프리츠(Stephen Fritz)의 『전선의 병사』(Frontsoldaten)와 기 사예르(Guy Sajer)의 『잊혀진 병사』(The Forgotten Soldier)를 추천하고 있다.
  23. May 19, 1985, p. 15.
  24. Aerospace Power Journal, Summer 1994, no page.
  25. Aerospace Power Journal, Summer 1994, no page.
  26. 주유럽미군의 역사가 브루스 H. 시에먼(Bruce H. Siemon)이 저자에게 들려준 일화.

동부전선의 신화: 미국 대중문화의 독소전쟁-4(6) 동부전선의 신화

대중 역사책, 특히 시각 자료가 많은 역사책들은 독일 장군들이 쓴 회고록의 증언을 뒷받침해 주었다. 특히 가장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읽은 역사책을 쓴 사람은 폴 카렐이었다. 카렐의 책 중 『히틀러가 동쪽으로 움직이다, 1941-1943』과 『그을은 대지』(Schored Earth)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1 이 책들과 카렐이 쓴 다른 책들은 시각 자료를 아낌없이 썼으며 독일과 미국에서 수백만 부가 판매되었다.2


카렐은 스스로를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장군들의 자료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 카렐은 자신의 책에서 독일 국방군을 패할 것이 뻔한 싸움에서도 싸우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카렐은 독일 군인은 사악한 독재자와 싸우며 깨끗한 전쟁을 치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카렐의 책에는 동부전선의 본질인 침략전쟁이나 인종절멸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다. 친위대 또한 다른 국방군 병사들과 똑같은 존재로 나온다. 카렐은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증폭된 적의 물질 및 인적 우세에 독일군이 압도되어 패했다고 서술했다. 카렐은 "만약에" 역사의 한 종류로 스탈린그라드나 쿠르스크 같은 전환점에서 독일군이 쉽게 승리의 길로 갈 수 있었지만 불운하게도 그렇게 도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카렐의 책에서 공산주의의 아시아적 야만족 무리 이외의 악당이 있다면, 무책임한 참견을 하여 전문 군인이 가져다 줄 수 있었던 독일의 승리를 망쳤다고 서술된 히틀러였다.


카렐은 전쟁 동안 군인이 아니었지만 나치 체제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독일인이었다. 카렐의 본명은 파울 카를 슈미트(Paul Karl Schmidt)로, 그의 정체는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가 장관으로 있던 독일 외무부의 언론 대변인이었다. 카렐은 그곳에서 외신에 발표할 선전선동 자료를 만들었다. 카렐은 외무부에서 일하면서 국방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전쟁을 독일과 외국인들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많은 부분을 배웠다. 카렐이 선전선동가로서 가장 전문적이었던 주제는 유대인 문제였고 그는 유대인을 자주 "정치적 병균, 어떠한 국가조직도 부패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효소"로 낙인찍었다.3 카렐은 1950년대부터 전쟁사 서적을 출간해 왔고 1997년에 죽을 때까지 계속 관련서적을 출간했다.


독일 국방군을 낭만화하는 또 다른 조류는 일반 병사들의 회고록을 보충해 주는 대중 전쟁소설이었다. 이 장르에서 가장 성공적인 인물은 스벤 하셀이었다. 1917년에 태어난 하셀은 독일계 덴마크인으로 오스트리아인 조상을 두고 있었다. 하셀은 전쟁 전에 덴마크에서 살았지만, 제복을 입고 복무하고 싶어서 1937년에 보트 한 척을 타고 독일로 밀항했다. 거기서 하셀은 시간이 흐른 후 국방군에 입대해 폴란드 진격에 참여했다. 하셀은 1년 후에 탈영을 하여 체포된 후 탈영병, 범죄자, 반체제 인사, 그리고 체제에서 반사회적이라는 딱지를 붙인 사람들로 구성된 형벌 대대에 배치되었다. 이 부대들은 지뢰제거를 비롯한 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이 부대의 사상률은 끔찍할 정도였다. 하셀은 북아프리카 전선을 제외한 모든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고 7번 부상당했다. 하셀은 대부분 동부전선에서 싸웠다. 하셀은 1945년에 베를린에서 포로가 되어 4년 동안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하셀은 1951년에 결혼한 후 부인의 도움으로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하셀의 첫 번재 작품인 『저주받은 군단』(Legion of the Dammned)은 1957년에 발간되었고 이후 『공포의 바퀴』(Wheels of Terror, 1959)와 『전쟁의 동료들』(Comrades of War, 1963)을 발간했다. 하셀은 총 14권에 소설을 썼고 16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50개 국가에서 출간되었다. 하셀의 책은 총 5,200만부가 판매되었다.


하셀의 첫 번째 책은 저자가 동부전선에서 직접 경험한 것임을 주장하고 있고 다른 책들은 픽션임을 밝히고 있다. 하셀의 책들은 1950년대와 60, 70년대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몇 십년 후에 절판되었다. 『저주받은 군단』과 『공포의 바퀴』, 그리고 최근작『친위대 장군』(SS General, 2003)을 비롯한 책들은 카셀 밀리터리 페이퍼백(Cassel Military Paperback)으로 출간되었으며 다른 책들의 복간 계획도 있다. 카셀 출판사의 책표지 디자이너들은 독자들에게 전투행동 중인 독일 병사를 감상적으로 보여준다. 『저주받은 군단』의 표지그림은 광분하고 화난 독일 병사가 봉형 수류탄을 잡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에서 이 병사는 확시히 적에서 수류탄을 던질 것처럼 보인다. 그림의 적색과 황색 배경에 있는 불타는 건물은 책표지로 시각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이 책은 정발로 "졸병"(Grunt) 소설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패배한 밴드 오브 브라더스다. 이 책의 독일 병사들은 자신들이 증오하는 체제를 위해 싸운다고 믿지 않는 괴로워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경험 많은 전문 킬러이자 자신들이 생존할 기회에 숙명론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시간이 되면 술을 잔뜩 마시고 좋은 음식과 여자를 찾는다. 그들 대부분은 상스럽고, 냄새나고, 냉혹하다. 이런 등장인물의 전형은 하셀의 소설에 나오는 "포르타"(Porta)다. 포르타는 베를린 출신으로 반사회적인 악당이며 뛰어난 저격수이자 전차 운전수, 음악가, 미식가이자, 큰 소리로 허세를 부리고, 노란 실크해트를 쓰고 주머니에 그의 고양이 스탈린을 넣고 전투를 치른다. 다른 등장인물인 "꼬맹이"(tiny)는 범죄자 출신의 키가 7피트에 몸무게가 260파운드인 거한으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폭발물 전문가고, 적이 몰레 접근하는 것을 알아채는 뛰어난 청각 때문에 동료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 "군단병"(Legionair)은 몸이 작달막하지만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의 맹렬한 싸움꾼으로 특히 나이프를 잘 다루며 성적인 말을 즐겨 말하고 전후에 포주가 될 거라는 야망을 드러낸다. "올언"(Ol'un)은 부대원들보다 10살 연상에 결혼했고 아이들이 있다. 올언은 침착한 인물로 포화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으며 지도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 등장인물들은 히틀러를 싫어하고 그가 만들어낸 친위대나 게슈타포도 비웃으며 힘러, 괴벨스, 괴링 같은 다른 정치 지도자들도 싫어하고 장군들도 좋아하지 않는다. 히틀러와 몇몇 장군들이 그들의 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만슈타인 원수의 방문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만슈타인 원수가 차에서 내리자 그의 참모부의 모든 참모장교들로 보이는 장교들이 그를 뒤따랐다. 수많은 훈장들이 반짝였다. 두개의 금색 견장과 외알안경이 너무 많아서 나는 장군들이 다 안경을 쓰고 있는 걸로 생각했다. 그리고 박차 소리와 군도가 딸깍이는 소리가 너무 커서 기병대 하나가 돌격하는 줄 알았다."4


친위대는 특별히 증오의 대상이었다. "일반 병사들이 공격할 단계면 친위대 부대는 뒤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전투가 중단될 때면 친위대를 조롱할 수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친위대는 또 뒤로 빠졌다."5 하지만 친위대에 대한 하셀의 서술은 일관되지 않았다. 하셀의 최신작 『친위대 장군』의 주제는 강인한 친위대 장군이 형벌 대대를 지휘해 스탈린그라드에서 탈출하여 수백만 마일 뒤의 독일군 전선으로 후퇴하지만 결국 스탈린그라드를 떠남으로서 히틀러의 특별 명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총살당한다는 이야기다. 형벌 대대의 병사들은 친위대 장군을 보고 적대적으로 반응하지만, 그에게 맞서지 못하고 지휘관으로 받아들인다. 그들 중 한명이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를 뒤에서 노려보고, 싫어하고, 얕잡아보고, 죽이고 싶어하거나 진심으로 우리에게 그를 굴복시키고 싶어했어. 우리가 훈련을 너무 잘 받은 거지. 우리는 맹목적인 복종에 몇 년 동안 익숙한 프로이센의 노예였어. 장군의 말에 반대한다고 손을 드는 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일이란 거야."6


이 병사들은 장군들과 공통의 기억을 한 가지 찾아낸다. 그들은 러시아의 동장군이 독일 군인에게 러시아군보다 더 영향을 끼쳤고 그것에 희생되었다고 생각한다. "적의 포화보다 서리와 질병에 더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러시아의 겨울은 러시아군이 가진 최고의 동맹군이었다. 시베리아인 부대만이 그 겨울을 견뎌낼 수 있었다. 겨울이 시베리아인 부대들을 더 편안하고 전투력을 충만시켜 주는 것처럼 보였다."7 스텝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눈폭풍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러시아군은 이런 기상에 익숙해 그걸 견뎌낼 장비를 갖추고 바람도 그들에게 유리하게 불었다. 우리 독일군은 그것에 겁먹었다."8


주인공 부대는 러시아군에게 자주 친근감을 느꼈다. 양 측이 우연히 한 강에서 몸을 씼게 되었다. "러시아군 부사관이 이렇게 소리쳤다. '이것도 전쟁의 한 종류지. 그렇지 않나?' 우리도 그에게 동의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행운을 빌어줬고 우리도 그들에게 행운을 빌어줬다."9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러시아군 병사들을 자주 "동료"로 부른다. 이러한 경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완전한 픽션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1914년 12월 크리스마스에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 하지만 이건 전쟁 초의 일이었고 그러한 자발적인 교류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하셀의 책에서 전쟁이 계속되며 더욱 야만스럽게 변했다. 하셀은 다른 작품에서 그랬듯이 양측의 "작은 사람들"의 공통의 인간성을 강조하려고 시도하는 듯 하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나치의 민간 당국자들은 제외하고 독일 장군들 및 병사들이 러시아 민간인들과 사이가 좋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랬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하셀의 소설에서는 나치의 인종주의적 단어인 "아시아적"이나 "시베리아인"이 그대로 노출되어 조국의 국민들을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하는 야만족으로 러시아군을 묘사한다.10 한 등장인물은 주인공 부대와 음식과 식수를 나누던 소련군의 칼미크족 부대에 대해서 이렇게 이렇게 보았다. "그들은 이 때만은 양처럼 순하다. (중략) 하지만 저들의 신경을 잘못 건드리면 수 초만에 목이 잘릴 것이다."11


하셀은 정치적으로 좌파에 반파시트지만 그의 작품들은 영웅적인 독일 국방군의 신화, 뙤는 최소한 영웅적인 일반 병사들이라는 신화에 기여하고 있다. 하셀의 소설에서 병사들은 치열하게 싸우지만 상대가 적일 때만 싸운다. 병사들은 러시아 민간인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자주 친교를 맺으며, 적은 음식이라도 그들과 공유한다. 하셀의 책에서 러시아의 농민들은 친절하고 은혜를 입으면 보답을 한다. 한 경우 독일군이 러시아인 산모의 산파 역할을 하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한다.12 하셀의 소설에서 독일 국방군이 실제로 체제의 전쟁범죄에 상당히 협력했다는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독자는 소설의 주인공들인 사람들이 독일 점령군의 일부라도 그러한 학살을 실행했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외부 세계와 고립된 자신들만의 작은 세계에 있다. 이것은 독소전쟁의 전체 맥락에서 확실히 벗어나 있다. 게다가 이 독일 병사들은 어느 정도 거친 면에 매력적인 인물형들로 자세히 묘사되지만, 등장하는 러시아인들은 피상적으로만 묘사된다.


하셀의 소설 속의 군인들은 다른 나라 군대의 군인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영화 "더티 더즌"(Dirty Dozen)의 등장인물들을 닮은 동시에 빌 몰딘(Bill Mauldin)의 만화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닮았다. 이리하여 가장 범죄적인 사건에 이들이 마지 못해서라도 참여했다는 사실을 왜곡한다. 또한 소련의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는 게슈타포와 다른 것이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공산주의나 나치, 낫과 망치나 스바스티카는 다른게 없었다." 소설 속 한 등장인물의 대사다."13 마지막으로 소설의 시점은 독일로 비극적인 후퇴를 하는 기간에만 있다. 하셀의 소설의 대붑분은 1943년이나 그 이후의 동부전선이 시점이고 승리를 거두며 진격하던 시점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리하여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비극적 최후를 맞고, 생존자들은 지는 해를 향해 걸어가며 끝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독일에서 유행했던 전사(Landser) 소설들과 다른 점이 없다.


하셀의 소설들은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스웨덴어, 핀란드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유럽 각국으로 판매되었다. 하지만 『공포의 바퀴』만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만 출간되었고 다른 언어로 번역되지 않았으며 1988년에 영화화되었다. 아마 이 소설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지 않은 이유는 독일인들 스스로가 이 책이 독일군을 다른 소설들보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낭만화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 전쟁소설과 비슷한 회고록들이 최근에 출간되었다. 이 회고록의 저자들은 하셀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과 같은 "졸병"들이다. 그 책에는 귄터 코쇼렉(Gunter Koschorrek)의 『피의 붉은 눈: 동부전선의 독일 병사의 회고록』(Bood Red Snow: The Memoirs of a German Soldier on the Eastern Front), 고트롭 비데만(Gottlob Biedermann)의 『치열한 전투에서: 동부전선의 한 독일 병사의 회고록』(In Deadly Combat: A German Soldier's Memoir of the Eastern Front) , 그리고 아르민 샤이데바우어(Armin Scheiderbauer)의 『젊은 시절의 모험: 1941-1945년 동부전선의 한 독일 병사』(Adventures in My Youth: A German Soldier on the Eastern Front, 1941-45)가 있다. 이러한 회고록들은, 앞으로 볼 것이지만, 하셀의 전쟁소설과 상당히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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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각각 New York, Bantam, 1965와 New York, Ballantine, 1966으로 출간.
  2. 이 두 책은 1965년부터 1967년 1월까지 5판이 나왔다.
  3. 카렐에 대해서는 Ronald Smelser, "The Holocaust in Popular Culture: Master-Narrative and Counter Narrative in the Gray Zone," in Jonathan Petropoulos and Kohn K. Roth (eds) Gray Zones. Ambiguity and Compromise in the Holocaust and Its Aftermath (New York, Berghahn Books, 2005), pp. 275-77을 참고할 것. 카렐의 발언은 p. 276에서 인용했다. 카렐의 대한 최근의 연구는 비크베르트 벤츠(Wigbert Benz)의 전기 Paul Carell. Ribbentrop's Pressechef Paul Karl Schmidt vor und nach 1945 (Berlin, Wissenschaftlicher Verlagn, 2005)을 참고할 것.
  4. SS General, p. 290.
  5. Legion, p. 227.
  6. SS General, p. 172.
  7. Wheels, p. 130.
  8. SS General, p. 172.
  9. Legion, p. 179.
  10. Wheels, pp. 280-81.
  11. SS General, p. 236.
  12. Wheels, p. 260-63.
  13. SS General, p. 265.

동부전선의 신화: 미국 대중문화의 독소전쟁-4(5) 동부전선의 신화

장군들의 경우보다 더 많이 판매된 회고록으로는 『슈투카 조종사』(Stuka Pilot)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한스 울리히 루델의 회고록이 있다. 루델은 회고록에서 전략과 작전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히틀러와 거리를 두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 회고록은 루델의 행동만으로 가득 차 있다. 루델은 이 책에서 자신이 수행한 급강하폭격과 소련군 전차를 파괴하는 끝없는 임무들을 기록해 놓았다. 이 책의 이야기는 적 전차 파괴, 열성적인 임무수행, 감성적인 지도력, 그리고 위기의 순간들을 담고 있다. 이 회고록은 대소전 개전 때부터 시작하지만 대부분 스탈린그라드에서부터 베를린에 이르는 오랜 후퇴와 러시아인들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한 루델의 결단에 할애하고 있다.


루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공훈을 많이 세운 독일 군인이었다. 루델은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은 후 5개의 메달을 수여받았다. 전쟁 말에 루델의 공훈은 때문에 히틀러는 루델에게 새로운 메달인 황금곡엽검금강석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했다. 루델은 전쟁에서 이 메달을 유일하게 수훈한 사람이었다. 루델은 히틀러에게 여러 번 훈장과 메달을 직접 수여받았다. 루델은 슈투카 급강하폭격기(Ju-87)을 타고 2,530회의 임무를 수행해 적 전차 500대, 트럭 700대, 대공포 진지 150개와 소련군 전함 한 척을 파괴했다.. 루델은 32번 격추당했다. 루델은 전쟁의 마지막 달 동안 의족을 달고 비행했다. 스탈린은 루델을 생포하는 자에게 100,000 루블의 상금을 주겠다고 공표했다.1 루델은 "동부전선의 독수리"2로 불렸다. (루델은 거의 동부전선에서만 싸웠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쇠르너(Ferdinand Schorner) 원수는 "루델은 1개 사단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3 루델의 가장 유명한 말은 "패배는 자신을 포기한 것에 불과하다."이었다.


루델의 책은 1958년과 1966년까지 5판이 발간되었으며 마지막 판본은 발렌타인 출판사의 페이퍼백으로 상당한 양이 판매되었다. 루델의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 총 발간량은 100만 부를 넘었다."4


만슈타인과 구데리안과 같은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루델의 회고록도 이전의 적이었던 연합군의 인사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슈투카 조종사』의 서문은 영국의 전투기 조종사이자 영웅인[그는 다리를 잃고 나서도 출격했다] 더글러스 베이더(Douglas Bader)가 썼다. 베이더는 전쟁 동안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적이 있었드데 그때 루델 공훈에 대해 들었다. 전후에 루델이 포로로 잡혀 잠시 영국에 있을 때, 베이더는 루델에게 새로운 의족을 선물해 주었다. 베이더는 루델의 회고록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루델의 책에 이 짧은 서문을 써 주어서 행복하다. 나는 루델을 이틀 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그의 품성과 호쾌함에 즐거웠었다. 나는 그에게 행운을 빌어 주었다."5 이와 비슷하게 귄터 유스트(Geunther Just)가 저술한 루델의 전기(1975)의 서문은 연합군의 조종사 피에르 클로스테르망(Pierre Clostermann)이 썼다. 전쟁 동안 프랑스군의 가장 성공한 조종사였던 클로스테르망은 루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루델이 거둔 공적 이야기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싸움에서 인간의 가장 고귀한 미덕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전기의 표지그림은 슈투카가 목표를 향해 급강하하고 있는 그림이고 왼쪽 구석에는 멋지게 군복을 차려입고 웃고 있는 루델의 사진이 있다.6


몇몇 부분에서 루델은 회고록을 쓴 고위급 독일군 장교들과 시야를 공유하고 있다. 루델은 대소전이 예방전쟁이라고 믿고 있다. "소련이 우리를 침공할 기지를 준비한다는 의미로 보였다. 서구의 누가 러시아의 공격을 원할 수 있겠는가?"7 루델은 러시아의 문화 수준이 낮으며 러시아 시민의 본성이 원시적이라고 강조했다. 루델은 러시아인이 움막에 살고 있다고 썼다.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 원시적인 나라의 사람들이 300여년간이나 이렇게 살았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여기서 제일 좋은 가구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흰색으로 칠한 3 피트 높이의 큰 석재 난로밖에 없다. 이런 집에서 삼대가 살고, 먹고, 울고, 자손을 낳고 죽은 것이다."8 루델은 독일의 패배를 설명하기 위한 속죄양도 사용했다. 러시아의 겨울이 이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었다. "러시아의 겨울은 육군의 진격에 큰 문제였다 (중략) 육군은 받아들이기 힘드 정도로 무자비한 겨울에 땅을 파고 참호 속에 있어야 했다." 러시아의 광대한 크기도 패배의 원인 중 하나였다. "러시아의 막대한 국토는 가장 가치있는 아군이었다. 러시아의 끊임없는 인력 때문에 적은 방어가 약한 어느 곳이라도 대군을 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미국의 도움으로 달성한 러시아의 막대한 물질적 우위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독일 군인은 (중략) 적의 장점에 꺾인 게 아니라 막대한 물량에 무너진 것이다."9


하지만 루델은 지휘관으로서의 히틀러를 폄하하고 이 독재자와 자신의 차이와 거리를 강조한 장군들보다는 솔직했다. 루델은 자신이 히틀러를 존경하였음을 숨기지 않았고 장군들이 러시아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으로 히틀러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고 주장하고 그들을 비판했다.10 루델은 히틀러에게서 첫 번째 메달을 수여받은 부분에서 이렇게 썼다. "전선에 있는 우리 모두는 히틀러가 모든 자세한 사항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음에 놀랐다. (중략) 히틀러는 아이디어와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중략) 히틀러가 발산하는 침착함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 우리 모두는 그의 방문으로 활기를 되찾아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 루델은 다른 경우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히틀러의 온정과 친절한 말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또 이렇게 썼다. "나는 히틀러가 탄도학, 물리학, 화학 지식을 세밀한 부분까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11


루델은 오만해 보일 정도의 자신감을 보여줬다. "나는 다양한 경험과 잠결에 돌아다녀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의 확신 때문에 두 번 망설이지 않고 전차의 취약부분을 정학히 때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루델은 자신을 겁이 없으며 인생을 긍정하는 사람으로 서술했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인생을 사랑한다. 나는 내 피부의 모든 구멍마다, 내 몸 전체로 숨을 쉰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는 죽음을 두 번째로 흘깃 볼 뿐이지 처음부터 보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과 마주칠 때마다 내 심장이 기뻐하고 가끔은심장이 엔진의 소리만큼이나 환희에 가득차 소리를 낸다."12


루델은 자신의 비행중대를 열광적으로 이끌었다고 서술했다. 루델은 자신의 중대를 떠나길 거부했다. 루델은 간염으로 입원했을 때, 출격하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를 거부했다. 루델은 다리를 잃고 난 뒤에도 의족을 달고 출격했다. 루델은 여러 번 히틀러에게 상을 받았지만 비행을 하지 말라는 히틀러의 명령도 위반했다.13 루델은 자신이 볼셰비키 야만족 무리로부터 조국을 수호한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만큼 내 부상에 절망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몸이 있는  모든 사람이 필요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저주하며 모든 것에 맞서야 한다고 느낀다." "나는 5번 부상당했고 그 중 중상도 입었지만 항상 운 좋게 빠르게 회복되어 얼마 안가 동부전선에서 매일, 매달, 매년 기체를 몰고 날아다녔다. (중략) 나는 러시아 전선이 뒤집어졌다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포성이 멈추고 우리 조국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날아올라 싸워야 한다는 의무감을 떨칠 수 없었다." "나는 스텝에서 달려온 야만족 무리가 유럽의 심장부로 입성할 때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14


루델은 서방 연합군이 멍청하게도 러시아를 돕고 있다고 이미 언급했다. 루델은 결국 러시아가 서방에 맞서면 그 대가를 치를 거라고 언급했다. "악마는 독일과 전유럽을 상대로 도박을 하고 있다. 가치를 따질 수도 없을 만큼의 전력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세계의 모든 보루가 붉은 아시아의 공격에 무너질 것이다." "서구 강대국들은 볼셰비즘이 그들의 가장 큰 적이며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엔는 그들이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며, 그 때 독일이 없어져서 자신들이 홀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볼 수 없다는 말인가?" 그리고 루델은 회고록 끝에서 럿이아를 적으로 보기 시작한 미국과 영국에 만족을 표했다. "그들은 대량 약탈과 강간 및 살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중략) 이제 그들의 관점은 우리가 주장한 것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으며, 우리의 말들을 여러 말로 옮기고 있다."15 마지막으로 루델의 세계는 남자들의 세계였다. 루델은 자신의 부인을 책 전체에서 두 번만 언급했다. 첫 번째는 그녀와 결혼했을 때고, 두 번째는 전쟁 말기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실을 지켜줬을 때였다.16 슈탈베르크의 회고록처럼 가족에 대해 길게 서술하여 자신을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고 자신의 날카로운 삶을 더 온화하게 보이려 하는 시도는 없었다.


미국의 한 조사관은 루델을 "전형적인 나치 장교"로 기록했다.17 이 평가는 틀린 게 아니었다. 전후에 루델은 자신이 나치로 기울어져 있음을 숨기지 않았고 전후 동안 여러 번 극우조직에 가입했다. 전쟁 직후에 루델은 아르헨티나로 가서 자신을 군사고문으로 기용한 독재자 후안 페론(Juan Peron)과 친분을 맺었다. 루델은 남아메리카에 있으며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와 함께 나치 당원들을 남아메리카로 탈출시키는 "아이히만-룬드"(Eichmann-Runde) 조직에서 활동하고 지원했다. 루델은 독일로 돌아와 극우 신나치 정당인 "사회주의 제국당"에 가입했고 이 정당이 금지당하자 그 후신인 "독일 제국당"의 성공적이지 못한 대변인이 되었다. 이 두 당의 대부분의 당원들은 나치 당원 출신들이었다. 루델은 1982년에 사망했다. 루델은 죽을 때까지도 나치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독일연방군 공군의 팬텀 전투기 2대가 루델의 무덤 위를 비행했고 수많은 조문객들이 나치식 경례로 조의를 표했다. 이 일은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루델의 전기작가는 그와 페론의 우정을 언급했지만, 페론은 루델의 정치활동에 대해 침묵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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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스-울리히 루델에 대해서는 https://en.wikipedia.org/wiki/Hans-Ulrich_Rudel을 참고할 것. http://www.achtungpanzer.com/gen9.htm도 참고할 것. 이 사이트의 정보는 외르크 무트(Jorg Muth)가 출처다. members.aol.com/ab763/rudel.htm도 참고할 것. (역자 주: 링크 접속 불가)
  2. 루델에게 과도할 정도로 찬사를 바치는 전기인 Gunther Just, Stuka-Pilot Hans-Ulrich Rudel: His Life Story in Words and Photographs (West Chester, Pa., Schiffer, 1990), p. 9를 참고할 것.
  3. Ibid., p. 39.
  4. Ibid., p. 36.
  5. Rudel, Stuka Pilot (New York, Ballantine Bal-Hai printing, June 1966) p. 8; 이후의 판본은 눈타이드 출판(Noontide Presse)의 "전쟁과 전사 시리즈"에서 1987년과 1990년에 출간되었다.
  6. Just, Stuka-Pilot, p. 7.
  7. Rudel, Stuka Pilot, pp. 21-22.
  8. Ibid., p. 47.
  9. Ibid., 인용문은 pp. 49, 113-14와 233에서 인용했다.
  10. Ibid., pp. 161, 188.
  11. 히틀러에 대한 인용은 Ibid., pp. 80, 136, 189에서 인용했다.
  12. 두 인용문은 Ibid., pp. 206-07, 55에서 인용했다.
  13. Ibid., pp, 136, 187, 196을 참고할 것.
  14. 세 인용문은 각각 Ibid., pp. 176, 184, 193에서 인용했다.
  15. 세 인용문은 각각 Ibid., pp. 200, 212, 238에서 인용했다.
  16. Ibid., pp. 53과 210이 루델이 회고록에서 부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17. Ibid., p. 234.
  18. Informationsdienst gegen Rechtsextremisus: (http://lexikon.idgr.de/r/r_u/rudel-hans-ulrich/rudel-hans-ulrich.php.)를 참고할 것. (역자 주: 링크 접속 불가)

동부전선의 신화: 미국 대중문화의 독소전쟁-4(4) 동부전선의 신화

여기에 추가로 덧붙일 증거가 있다. 구데리안은 히틀러와 여러 번 충돌했고 전후에 자신을 반나치 인물로 묘사했지만, 그는 독일 장군들 중 가장 "나치"였다. 무엇보다 히틀러는 구데리안과 견해차가 있어도 그를 전쟁 동안 계속 현역으로 복직시켰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거친 성격과 소박함을 좋아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이 기갑전의 이론과 실제에 끼친 기여에 감탄했고, 무엇보다 구데리안이 국가사회주의의 가치 체계를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 구데리안은 7월 20일 사건 이후 장교들에게 "국가사회주의 지도 장교"로 특징지어졌었다.1


괴벨스도 확실히 히틀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데리안이 기갑총감이 된 1943년 3월에, 괴벨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구데리안은 항상 깨어 있으며 빈틈없는 지휘관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구데리안의 판단은 명쾌하고 합리적이며 상식이 풍부하다. 의심할 것도 없이 나는 그와 잘 일할 수 있다. 나는 구데리안에게 끊임없는 지원을 약속했다."


괴벨스는 정확히 3주 후에 이렇게 썼다. "나는 되니츠와 구데리안과 함께 총통과 긴 논의를 했다. 되니츠와 구데리안은 둘다 총통의 크나큰 자신감을 좋아했다."2


히틀러는 9월 1일에 볼프스산체(Wolfsschanze)에서 열린 상황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상황[서부방벽을 강화할 분견대를 보내는 일]에서 인종적으로 순수한 부대를 보낼 필요는 없지 않소?" 구데리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부대들도 인종적으로 순수해야 합니다."3


마지막으로 구데리안은 포로 상태일 때도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충심을 숨기지 않았다. 구데리안은 미 제7군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미군에게서 만약 그가 원한다면 미 육군청 역사과에서 이 전쟁의 역사서술을 하는 데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구데리안과 그의 전 부하인 레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는 이 수용소에 수감된 제일 고위직 장교인 빌헬름 폰 레프 원수를 만나 조언과 허가를 구했다. 미군은 이들의 대화를 비밀리에 녹음해 두었다. 레프는 구데리안이 미군에 협조하는 것을 동의했지만, 그에게 "이 문제[작전의 목표, 이유와 경과]에 대해 접근할 때는 답변에 신중해야 하오. 그렇게 해서 조국에 수치가 될 만할 일은 말하면 안되오."라고 말했다. 대화가 끝날 때, 장교들은 12년간의 제3 제국 생활을 회상해 보았다. 가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객관적인 관찰자들은 국가사회주의가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렸다고 인정할 것이고, 몇몇은 노동자의 삶의 질이 최대한 길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에 존경을 표할 겁니다." 레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건 국가사회주의의 큰 성과 중 하나였소." 구데리안이 이에 맞장구를 쳤다. "국가사회주의의 기본원칙은 좋았어요."4 물론 이 대화는 구데리안의 회고록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구데리안은 히틀러의 인종절멸과 인종 노예화를 국방군이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군이 동부전선에서 대량학살과 탐욕스러운 약탈, 노예노동을 실행했다는 암시조차 주지 않았다.


전후에 구데리안은 전직 독일군 장교단을 대상으로 한 여러 재판들을 피하는 데 성공했고 국방군의 복권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냉전이 시작되어 서구에서 독일군을 변호할 필요가 생기며 더 용이해졌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구데리안은 독일에서 짧은 책 『서유럽은 방어될 수 있을 것인가?』를 발간했다.5 구데리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러시아의 이득이 수세기 동안 계속된 동방의 서방 공격의 맥락에 있으며 서방은 이 공격을 방어하고 또 방어해야 한다며 책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볼셰비키의 위협이었다.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는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하여 소련의 체제를 "민주주의의 다른 형태"로 본 서구의 강대국들과는 달리 소련을 동방의 치명적인 위협으로 파악했다. 히틀러는 독일이 볼셰비즘을 무너트리고 파괴할 최후의 기회를 잡기 위해, 다른 독재와 맞서기 위해 독재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 구데리안의 주장이었다. 구데리안은 히틀러가 동방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서구와 압묵적인 거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서구가 선전포고를 하자 실망했으며, 볼셰비즘에 대항한 전쟁을 파멸로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구데리안은 이렇게 썼다.


"이 전쟁[대소전]의 과정에서 유럽사에서 빈번히 나오는 상황이 발생했다. 유럽이 동방의 위협으로부터 방위력이 약해지는 시기 말이다. 서구 강대국들은 미국의 막강한 힘으로 강해져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과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데도 독일의 후방인 노르망디에 상륙해 독일의 힘을 무너트렸다. (중략) 누구도 그들이 히틀러의 또다른 형태의 독재와 거래를 하고 있는 줄 몰랐다. (중략) 독일의 수천년 역사에서 독일의 역사, 독일의 식민지, 독일의 문화와 문명이 중부 유럽에서 사라졌다."6


다시 말하면, 서구의 변절이 서구 문명의 가장 거대한 위협에 맞서 싸우는 독일이 패전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독일 군인은 유럽을 위해서만 싸운 것이 아니었다. 연합군은 러시아인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이 참여하게 허락해 주었다. "그 목적은 유럽의 수호자들을 재판에 넘기기 위해서였다. 히틀러의 행동은 돌이켜보면 많은 심각한 실수와 오류를 범하긴 했어도 유럽을 위해 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군인들은 유럽을 위해 싸우고 쓰러졌다."7 참으로 파렴치하다. 이보다 나치의 1944년과 1945년판 선전선동을 제대로 요약한 문구도 없을 것이다.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다시 나타날 다른 점들, 히틀러가 오류가 많았었고 실패한 지휘관이며, 러시아 민간인들을 가혹하게 다룬 것은 나치의 민간당국이었을 뿐이고, 독일군이 러시아의 겨울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주장을 여기서도 보여주었다. 구데리안은 나치의 인종 선전선동(회고록에서는 많이 삭제한)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우리는 동유럽인의 온전한 형태를 보았다. 러시아인들과 이들보다 더한 아시아적 인간들은 그들의 욕구, 어려움, 집요함, 처벌에 대한 익숙함과 러시아와 아시아의 대륙성 기후의 가혹함으로 인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원시성으로 서구 사람들을 약탈했다. 이러한 유형의 인간들은 전투가 시작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겁이 없다."8


하지만 구데리안은 소비에트 연방을 경제적, 기술적, 정치적, 아니면 군사적으로 과소평가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이 모든 것이 독일의 재무장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구데리안은 유럽방위는 독일이 완전히 회복되고 서구의 독자적인 파트너가 되어야만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9 구데리안에 의하면 서구 강대국들은 독일을 완강하게 지켜야 하며, 러시아가 유럽을 휩쓸지 못하게 하고 이 지역에 돌아와 해방시켜야 했다. 이러한 문맥은 수감된 독일 장교들을 석방하고, 연금을 비롯한 그들의 권리를 되찾으며, 고위 사령부 인력들을 미래의 새로운 독일군을 위해 활용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구데리안은 미국의 정보요원들이 그를 조사하며 발견했듯이,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전 동료들과 일했다.10


미국인들은 처음부터 구데리안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의 조언을 구했다. 우리가 전 장에서 언급했듯이, 구데리안과 전쟁 직후에 인터뷰를 한 조지 슈스터는 그에게 사로잡혔고 워싱턴에 와서 미군에 조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구데리안은 이 요청을 들어준 보상으로 서구 방위에 기여할 새로운 독일군을 창설하기 위해 독일 장교들을 풀어줄 수 있을리고 기대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구데리안은 1944년에 말메디에서 미군 포로들을 총살하라고 명령한 무장친위대 지휘관 요하임 파이퍼(Jochen Peiper)를 변호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구데리안은 가이어에게 이렇게 썼다. "그 때 나는 핸디(하이델베르크) 장군과 협상했는데 이 명예로운 신사분이 불쌍한 파이퍼를 목매달고 싶어했기 때문이오. 맥클로이는 힘이 없었는데 말메디 재판은 미 유럽사령부의 소관이기 때문이지 맥클로이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오. 결국 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보를 쳐서 이 멍청한 짓에 익숙하냐고 물어보기로 결정했소."11 충분히 흥미롭게도 파이퍼는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사람들,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를 낭만화하는 미국인들의 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다른 고전 회고록은 F. W. 폰 멜렌틴 전 소장의 『기갑 전투』였다. 이 책은 1956년과 1976년동안 6판이 발간되었고 독일 국방군의 낭만가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다.12 멜렌틴은 남부연맹군 낭만가들이 쓰는 주장이기도 한 "무자비한 적, 막대하고 끊임없는 자원에 맞서" 독일군이 싸웠다고 말하며 인종적인 맥락에서 러시아 군인들을 묘사하고 조금의 존중도 보여주지 않는다. "대다수 러시아 군인은 정신적으로 둔감하며 손실에 대한 감각이 없다. (...) 그들에게 목숨은 값지지 않다. 러시아 군인은 가장 큰 고난에 면역이 되어 있으며,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한다. 그들은 폭탄이나 총탄과 다를 바 없다." 멜렌티은 많은 러시아 군인들이 그러한 이유를 " “소비에트 제국 깊숙이 숨어있는 아시아적 특성”에서 찾았다. 멜렌틴은 러시아 군인들이 “근본적으로 원시인이고 천부적으로 무모하며, 감정과 본능에 지배된다. (...) 그들에게는 진정한 정신적 균형도 없으며, 현명한 친절함을 짐승과도 같은 잔인함으로 바꿔놓는다”고 서술했다. 멜렌틴은 러시아인을 "둔감하고, 정신적으로 완고하며, 그 본성이 나태함을 지향한다."고 특징지었다.13


그렇다면 어째서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인종적으로 우월한 독일군이 열등인종 러시아군에게 졌단 말인가? 멜렌틴은 소련군의 대량 인력과 막대한 물질자원을 또 답으로 내놓았다. "독일 병사들이 러시아에서 거둔 성과는 러시아군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했다. (중략) 1944-45년의 치명적인 해들에도 우리 병사들은 러시아군보다 더 열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보다 약한 독일군은 바다 한가운데의 바위처럼 적의 인력과 전차의 끝없는 파도 속에 둘러싸여 파도에 맞서 싸우다가 물에 잠겼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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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einrich Schwendemann, "Strategie der Selbstvernichtung: Die Wehrmachtfuhrung im 'Endkampf' u, das "Dritte Reich,'" in Rolf-Dieter Muller/Hans-Erich Volkmann, Die Wehrmacht. Mythos und Realitat (Munich, Oldenbourg, 1999), p. 224.
  2. Entries of March 6 and 9, 1943, in Louis Lochner (ed, trans.), The Goebbels Diaries (New York, Eagle Books, 1948), p. 318, 328.
  3. Helmuth Heiber/Peter Glantz (eds), Hitler and His Generals. Military Conferences 1942-1945 (New York, Enigma Books, 2003), p. 483.
  4. NARA, RG319, Box 71A, Vol. 5, folder 3.
  5. 독일어판 제목은 Kann Westeuropa verteitigt werden? (Gottingen, Plesse-Verlag, 1950)이었다.
  6. Ibid., pp. 23, 28-29. (저자의 번역)
  7. Ibid., p. 30.
  8. Ibid., p. 35.
  9. Ibid., p. 54.
  10. NARA, RG319, Box 71A, Vol. 4, Folder 1에 있는 CIC 요원이 1950년 6월 5일에 보낸 보고서를 참고할 것.
  11. Guderian to Geyr, January 2, 1952, in Institut fur Zeitgeschidchte, Munich, Geyr Papers, ED 91, Vol. 18.
  12. A Study of the Employment of Armor in the Second World War (New York, Ballantine, 1976 edition).
  13. Ibid., 이 인용문들은 각각 pp. 259, 281, 319, 350, 그리고 352에서 인용했다.
  14. Ibid., p.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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