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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이글루스를 시작하며




1. 본 이글루는 소련군 작전술의 발전사 연구를 중점으로 삼을 것입니다. 

2. 본 이글루 주인장은 이 책의 역자입니다.


현재 전자화 되었으며 다음의 링크에서 판매 중입니다.

3. 조아라와 문피아에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자작소설 『경성활극록』을 연재중입니다. 

4본 이글루는 대조국 전쟁(독소 전쟁)은 데이비드 M. 글랜츠를, 조선사는 오항녕 교수의 역사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5. 본 이글루는 상당히 소련 편향적인 자료가 많이 올라올 것이고 주인장의 내공이 부족하여 다른 이름 있으신 분들의 피드백이 필수적일 것이라 올라오는 글들을 곧이 곧대로 믿으시면 안됩니다. 

6. 본 이글루는 각주, 미주, 참고문헌 목록의 제시를 좋아합니다




7. 본 이글루는 대륙견공과 환국신민 파시스트들을 사절합니다. 








8. 본 이글루는 소련 편향적이지만 위와 같은 선생들도 사절합니다.

9. 이글루스에 상주하는 묻 이름 있으신 분들과의 교류를 바랍니다. 굽신굽신







핀란드 교수의 한국 유사역사학 비판을 보고 떠오른 것 기타 역사

스페인에서 중앙일보 신용하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다




이거슨... 환핀대전!


혹시 정말로 Logie 교수가 인터넷에서 환핀대전 밈을 접하고 이게 대체 뭔 소린가 하고 찾아보다가 충격을 받고 연구를 시작한게 아닌가 합니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에 대한 오항녕 교수님의 서평 기타 역사

도덕성과 당쟁, 그리고 내로남불


국회도서관 의뢰로 쓴 서평입니다.

마침 역사와 도덕의 문제를 생각하게 해준 계기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서평 : 이정철,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너머북스, 2016)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1. 질문은 어떤 공부에서도 중요하다. 스님에게는 화두가 질문이다. 같은 화두가 역사학자에게도 있다. 궁금한 것, 풀리지 않는 것을 들고 가는 힘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힘이 있다. 앞서 낸 《대동법》, 《언제나 민생을 생각하노니》 등이 그랬듯이. 《대동법》에 대한 서평 제목이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였는데, 그 말이 이 책을 쓰는 데 화두가 되었다고 한다.(10쪽) 나는 이렇게 문제의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곱씹고 그걸 언젠가 글로 써내는 학자들을 좋아한다. 누구나 그렇지 않느냐고? 누구나 그렇지 않다. 화두를 들고만 있는 학자도 있고, 연구는 하되 연구가 자신과 겉도는 소외된 연구를 하는 학자도 있고, 묵직한 성과를 내는 학자도 있다. 같은 화두, 같은 성경말씀을 듣고도 성취가 다른 스님, 사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1. 이 책은 조선 선조 때 동서(東西) 분당이라는 사건에 대한 연구이다.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세조의 찬탈 이후 좌절되었던 일련의 정치집단이, 100년만인 명종 후반 등장하는데, 이들을 학계에서는 사림(士林)이라고 부른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집단이었다. 그런데 이들 사림이 조정에 등장한지 불과 20년만에 갈라졌다. 왜 그랬을까? 저자의 말을 빌면, 유익한 정치를 하도록 훈련받은 지식인 정치집단인 사림들이 왜 비극적인 갈라서기를 초래했나, 하는 것이다.

1. 이 책은 선조 8년(1575)부터, 정여립 옥사로 알려진 기축옥사(1589)가 일어난 뒤인 선조 23년(1590)까지의 정치사를 다루고 있다. 임진왜란(1592)을 거치면서 사료가 많이 유실되어 이 시기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선조실록》도 듬성듬성하고, 《선조수정실록》도 자료를 추가했다고는 하지만, 율곡의 《경연일기》만한 1차 자료가 없을 정도로 자료가 성글다.

1. 그래서 이 책이 갖는 의미가 크다. 동서분당 시기의 사건 전개를 이 책만큼 정리한 연구는 없었다. 나 역시 이 시기에 대해 율곡의 《경연일기》를 번역했고, 기축옥사에 대한 논란을 다룬 《유성룡인가, 정철인가》를 쓴 경험이 있지만, 사건의 흐름을 다시 복습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되었다. 독자들은 이 책 하나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기초사실을 이해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너무 자세해서 조금 건너뛰어도 될 정도이다. 읽을 때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 또 조금 낯선 용어나 제도는 그때그때 설명을 하면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겁을 먹지 않아도 된다.

1. 저자는 특유의 감수성을 가지고 사실을 해석할 줄 안다. 이런 능력은 사료를 꼼꼼히 읽은 결과, 즉 고민과 사색이 길었던 결과이지만, 아무튼 좋은 자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다보니, 선조, 이이, 유성룡, 이발, 정철 등 당대 인물들의 발언과 활동에 대한 이해도 섬세하다. “류성룡은 상대와 의견이 달라도 대놓고 반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잊어버리는 사람도 아니었다.”(130쪽), “계미삼찬에서 이이의 죽음까지의 일련의 정치적 경험은, 선조를 신중하게 만들었다.(279쪽) 등.

1.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참 아쉽다. 첫째, ‘선한 지식인’과 ‘나쁜’ 정치는 낯익은 프레임, 당쟁론을 연상시킨다. 물론 저자의 뜻은 그렇지 않고 서술도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이 그렇게 읽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둘째, 나는 역사가 인간의 도덕적 질문과 행위를 당연히 포함하고 있지만, 역사와 도덕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역사와 도덕의 영역을 혼동하면 인간의 행위가 ‘의지’의 문제로 환원된다.

1. 나는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구조, 의지, 우연이 다 담겨 있다고 본다.(이는 《호모 히스토리쿠스》 1부에 상세하다.) 구조만 알고 의지를 놓치면 세상탓만 하고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며, 의지만 알고 구조를 놓치면 개혁을 못하며, 우연을 놓치면 역사의 비극 또는 희극을 놓치게 된다. 이것이 역사가 도덕과 다른 이유이다. 아니, 역사가 도덕이 아닌 이유이다. 사림들의 ‘도덕적 올바름’이 이기론(理氣論)이나 그들이 읽은 책인 《심경(心經)》에 도덕적 신념이 담겼다고 해도(470쪽), 그들이 산 역사가 도덕으로 치환될 수 없다.

1. 치환되지 않는 것을 치환할 때 무리가 생긴다. 저자는 사림정치가 기축옥사에서 ‘정치적 파국’, ‘국가적 파국’을 맞았다고 보는 듯하다.(467쪽) ‘사림의 실패’라는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사림의 ‘극소수만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 후배, 제자였다. 아무리 기축옥사가 비극적이라도, 역사적으로 보면 그건 파국이나 실패가 아니라 정치사에서 흔히 보이는 ‘덜컹거림’이었다는 게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파국이나 실패로 단정하기에는 그 뒤 200년이 너무 길지 않은가 말이다.

1. 좋은 책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나와 의견이 같든 다르든 상관없다. 자꾸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 좋은 책이다. 계발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점일 텐데, 이런 느낌이 든다면 생산적인 독서일 것이다. 이 책은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http://www.experimentor.net/bbs/board.php?bo_table=b0203&wr_id=142&page=3


서평의 공유를 허락해 주신 오항녕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오항녕 교수님의 『탈진실의 시대, 역사 부정을 묻는다』 서평 책 잡설


* 본문은 오항녕 교수님이 이영훈, 주익종, 김낙년 등의 『반일 종족주의』를 비판하는 책들 중 하나인 『탈진실의 시대, 역사 부정을 묻는다』를 보고 쓴 서평으로 역사교육연구소 소식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공개와 배포를 허락해 주신 오항녕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탈진실의 시대, 역사 부정을 묻는다』 , 나름대로 읽어보기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재

『탈진실의 시대, 역사 부정을 묻는다』(이하 『탈진실의 시대』) 1부는 이영훈‘들’이 주장하는 극우 사관의 맥락을, 2부와 3부는 그에 대한 사실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이 책은 우선 두 가지 점에서 고마운 저술이다. 첫째, 뉴라이트 부일(附日) 극우 사관의 실제를 파악하고 싶은 분들은 입문과 심화학습을 이 책으로 겸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2학기 내가 맡은 대학원 강의가 ‘사료비판론’인데, 교재 중 하나로 쓸 것이다.


기억


2015년 9월, 이영훈의 “한국사회의 역사적 특질”이라는 발표에 토론을 맡았던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그의 발표문은 《반일 종족주의》의 밑밥 깔기였던 셈이다. 내 토론문은 〈계몽주의에 눌린 500년 문명〉이라는 온후한 제목이었는데, 좀 길어서 일부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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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훈이) 한국 사회 ‘저신뢰’의 원흉을 가족주의로 보고 관료주의와 연결시켰으니, 다음과 같은 생각은 어떨지. - 알렉산더 우드사이드는 관료주의의 문제에 대한 ‘전근대’의 해결에서 현재 닥친 관료주의의 대안을 포착한다. 우리처럼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불신(不信)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우드사이드는 이를 ‘관료제의 주관성’이라는 점잖은 표현을 쓴다. 빈곤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더 나아가 철학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재정 문제, 예산 문제로 환원하는 방식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선 시대에도 과거 시험이 문장력이나 테스트하는 사장학(詞章學)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 및 경고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문장만 잘 쓰면, 즉 보고서만 쓰다 보면 결국 현실적 제도의 다이나믹스로부터 '말, 개념, 정책 언어'가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우드사이드, 민병희 옮김, 『잃어버린 근대성들』, 너머북스, 2012 및 나의 서평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8477 )


- ‘성리학 망국론’과 유사한 논지를 제시하였기에 보론한다.


- 첫째, 당쟁론. ‘자본주의 맹아론’이라는 또 다른 근대주의에 의해 더욱 강화된 ‘식민사관’중에 당쟁론(黨爭論)이 있다. 정치 세력의 쟁투는 인류사의 보편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조선사회에서는 논쟁을 해결, 완충, 조정하는 다양한 형태의 제도와 관행이 조선에는 존재했다. 삼사(三司)의 피혐, 처치, 논계, 관원의 사직, 체직, 심지어는 귀양에 이르기까지. -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영훈 교수의 발표문에 음습하게 흐르는 당쟁론의 잔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쟁론이 식민주의자들의 주장이기 때문에 그르다는 바보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당쟁론은 식민사관의 특수한 논리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식의 결여를 보여주는 사유 또는 접근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의 배분, 정책의 결정과 시행, 사회와 나라의 비전을 다루는 정치사를 인간의 의지나 욕망만을 잣대로 서술하고 설명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 오류의 하나인 것이다. ①객관적 조건, ② 안타까운 우연은 당쟁론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당쟁론은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건을 설명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편협하고 비논리적인 시각인 것이다.(타율성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당쟁론이 인간의 의지나 욕망을 절대화한다면, 타율성론은 객관적 조건만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한다.)”(오항녕,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너머북스, 2015)


- 둘째, 공리공담론. “다카하시 도오루에서 이병도로 이어지고, 현재까지도 탈각하지 못하고 있는 정치사와 사상사의 분리 때문에 정치사는 당쟁사에 머물고 있고, 사상사는 성리학 공리공담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영농 중심의 생산기반, 지방 공동체의 강화, 재정 안정, 정부와 관료제의 공정한 운영, 건강한 인간, 책임 있는 정치가, 교육을 통한 인간완성 등 성리학이 실현하려고 했던 노력에 무지한 나머지 정치사는 권력투쟁으로 타락하고, 사상사는 공허해졌다. 성리학은 ‘허학이었다고 치고’ 사상사를 서술하기 때문에, 정작 실학이 극복하려던 성리학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성리학=허학=나쁜 것’으로 전제하는 무지막지한 만행이 여전하다.


- “근대주의도 우리의 눈을 왜곡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근대주의에는 목적론과 진보주의가 깔려 있다. 인류사회는 근대자본주의 사회를 향해 진보해왔다는 관점이다. 분명 근대사회에는, 신분 해방, 민주주의, 의료혜택 등등, 사람들의 삶을 더욱 편안하고 쾌적하게 만든 성과가 있다. 문제는 그 근대를 절대화하는 데 있다. ‘근대=선’/‘조선=전통=악’이란 도식이다. 근대주의는 일제 식민사관의 토양이었다. 광복 이후에 한국 역사학계가 식민사관의 극복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실패한 이유는 한국 역사학계가 빠진 근대주의 때문이었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근대주의로 근대주의(식민주의)를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식민주의와 근대주의를 합쳐 ‘범식민주의’라고 부른다. 담론이 식민주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프레임을 깨면, 그간의 성과가 훨씬 더 선명하게 왜곡 없이 드러나리라고 나는 믿는다.”(오항녕, 『조선의 힘』 서문, 2010, 역사비평사》


- 진보. “만약 인간 진보를 위해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희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희생당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하는 게 가장 주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포기하는 결정을 할 수 있지만 질병이나 건강, 삶이나 죽음처럼 명백하고 당면한 문제가 아닌 어떤 진보를 위해 다른 사람의 아이들, 심지어 자신의 아이들까지도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 속으로 던져 버릴 권리가 있는가?” “이 모든 문제를 제쳐 두고서 파괴된 문화와 사람들이 열등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하워드 진, 유강은 옮김, 『미국민중사 1』, 이후, 2006)


- “경제적, 기술적 합리성을 향한 진보가 반드시 민주적이고 능력주의적인 합리성을 향한 진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주된 이유는 간단하다. 시장과 마찬가지로 기술에는 제한이 없고 도덕성도 없다.”(토마 피케티, 장경덕 역, 『21세기 자본』, 글항아리, 2013)


- ‘근대, 진보’의 문제에 대해서, 한국 지식인들은 훨씬 더 치밀해져야 한다. 19~20세기 근대사회의 민낯까지 보았던 서구 지식인들보다 한국 지식인들은 아직 계몽주의에 대한 환상이강하게 남아 있다.


- 역사학이 종교와 다른 것은 목적론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 박정희 개발독재를 도덕적으로 폄하할 생각은 없다. 부국강병은 흔히 인치(仁治), 덕치(德治) 같은 왕도정치(王道政治)보다 못한 정치 운영이라고 생각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생존전략이기도 하였다. 한(漢)나라 때부터 그러하였다. 하지만 자본주의도 천차만별이듯이 부국강병 역시 정책으로 현실화할 때는 천차만별일 수 있다. 박정희 정권 시대가 생존과 적응의 시대라고 해서 그것이 곧 ‘칭양할 시대’ 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오항녕, 「그을린 민족문화- 전유, 내면화, 그리고 근대주의」, 『역사와현실』 9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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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토론문을 본 동료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별일 없었나?”

“왜?”

“때리고 욕하지 않더나?”

“아니!”

“그 사람, 전에 토론하는 사람이 좀 비판했더니 끝나고 술자리에서 그랬거던.”


소문일 뿐이다. 내 인품 탓인지 그런 일은 없었다.


진실

내가 잘 안 쓰는 말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다. 강성현의 책 제목에 들어 있는 ‘진실’이 그러하고, ‘진리’라는 말도 그렇다. 그 이유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유튜브에서 뉴스타파 프로그램을 가끔 듣는데, 끝날 때면 작고하신 이영희 선생님의 영상이 나온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애국이 아니야. 진실이야!” 이 말씀에 나오는 ‘진실’에서마저도 거부감이 드는 걸 보면 ‘진실’에 병적인 기피증이 있는 듯하다. 나는 진실보다 사실이라는 말이 편하다. 진실은 상대편에 허위, 거짓이 놓여있으니, 사실(事實)이든, 사실(史實)이든 그냥 사실이라는 말이 편하다. 아마 역사학도의 습관인지도 모르겠는데, 진실-거짓 이전에 사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실도 거짓도 사실을 자기편으로 끌어 온다. 진실에 모든 사실이 담겨있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또한 거짓에 사실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거짓이야말로 사실로 버무려진다. 이 책에서는 ‘부정’의 실증주의, 찬탈이라는 표현을 썼다. 남의 연구를 가로채거나, 나만 아는 듯이 젠체하는 태도라고 해서 전유(專有 appropriation)라고 쓰기도 한다. 그래서 ‘이 연구가 처음이다’, ‘아무도 이런 얘길 안 한다’ 등의 표현을 쓰는 저자가 있다면 일단 의심해보는 게 좋다. 그래서 사실을 다루는 역사학의 안목이 중요하다. 역사학의 사료 비판은 사실의 오해, 왜곡, 변조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탈진실의 시대』에서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덕목이다.


깡통

예상은 했지만, 이영훈의 사료와 논리가 이 정도로 형편없을 줄은 몰랐다. 이영훈의 정신대와 위안부의 물타기, 강제동원의 희석화, 위안부가 고수익 직업이었다는 주장의 황당한 데이터 등, 기존 연구 왜곡 및 무시하기 등등, 강성현이 비판한 『반일 종족주의』의 핵심 내용을 통해 나의 대학원생들은 2학기 수업에서 반면교사를 얻을 것이다. 강성현이 사실과 역사에 대한 냉소를 초래할까 우려하는 대목은 특히 공감한다. 이영훈이 기껏 냉소의 길로 꼬드겨놓은 걸 강성현은 사실의 위엄으로 복원한다. 정치든 역사든 냉소는 주인-민주의식, 연대의식을 약화하거나 배제시킨다. 나는 늘 말한다. 냉소야말로 신이 없든지 신이 인간을 미워한다는 증거라고.


역사

기억을 잡아두는 데 힘을 쏟다 보니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오직 ‘과거의 역사’로 보고, ‘사라지고 있으며 기억에 의해서만 보존될 수 있는 역사’에만 몰두하곤 한다. 그래서 동시대, 즉 현재는 너무 자명해서인지 제쳐두는 데 익숙하다. 벤느는 이런 역사학의 타성을 대신해서 사회학이 현재 존재하는 ‘문명인’의 역사를 맡고, 인류학이 현재 존재하는 ‘미개인’의 역사를 맡는다고 보았다. 저자 강성현이 ‘역사사회학자’로 소개되어 있는데, 벤느의 관찰대로라면 그는 본래의 역사학자이다.


자학

이영훈은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자고 한다. 건국 이래 대한민국을 독재-군부-반민주-친재벌-반공 등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학사관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영훈은 정작 조선 시대에 관한 한 철저한 자학사관에 빠져있다. 양반만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 시대, 나라, 사회, 문명을 싫어한다. 그 증오가 식민지를 정당화한다. 이영훈의 자학사관은 정 신분열을 겪고 있다. 시대 사실을 맥락 속에서 드러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사건이 파편적으로 이해될 우려를덜어준다. 둘째,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강성현은 작금의 사태를 두고 ‘탈진실의 시대’라고 불렀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조류는 이성, 자유, 평등이라는 근대적 가치의 신화화를 비판하면서 이들 가치의 절대성을 담론, 텍스트의 위치로 상대화했다. 역사학도 그 영향을 받았다. 역사학자들조차 ‘역사는 해석’이라는 말을 생각 없이 내놓았다. 그런가? 아니다. 역사는 사실의 발견(생산)-보존-이야기를 말이다. 사람마다 관심과 이해가 달라 그 사실을 끌어가는 해석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해석조차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 오항녕이 쓴 《탈진실의 시대》에 대한 서평이 맘에 드는지 어떤지, 수준은 괜찮은지 등에 대한 견해는 다를 수 있지만, 그 견해는 오항녕이 2020년에 서평을 의뢰받았고 7, 8월에 그 서평을 썼다는 사실에 근거해야만 한다. 사회적 다양성이 민주주의에 활력을 주고, 생물학적 다양성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해서 역사학 역시 다양성이 중심인 것은 아니다. 역사학의 토대는 사실이다. 물론 『반일종족주의』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유튜브 같은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과 기술력이 동원되며 한일 극우 세력의 협잡이 활발해지는 현상을 보면 ‘탈진실의 시대’라는 말이 수긍이 되기도 한다. 아마 역사-부정에 대한 우려 때문인 듯하다. 허나 지금 시대를 ‘탈진실’처럼 하나의 걱정스런 컨셉으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의 경우, 뉴라이트가 등장한 시기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10년 동안이었다. 친일진상규명법, 과거사정리기본법이 통과될 무렵이었다. 친일-독재-군부-반공 세력이 세상 변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시기였다. 이때는 민주 세력도 얼떨떨했다고 나는 본다.(한국 사회를 지나치게 이분화하는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당분간 이 틀은 주된 정치적 전선이 될 것이다. 민주역량, 남북평화, 한국의 국제적 리더십은 위의 이분법에 균열을 낼 주요 상수이다.)


이영훈의 책은 재건한 걸로 알았던 구체제가 촛불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출간되었다. 이영훈‘들’은 식민지 근대화론도 모자라 아예 위안부를 비롯하여 식민지 현실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게 현명한 전략일지 의문이다. 이렇게 까놓고 바닥을 드러내면 다음 전략을 어떻게 가져갈 수 있을까? 당장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라니 인세(印稅)는 많이 받아 좋겠지만, 정치세력의 전략으로는 하수라는 게 내 판단이다. 더구나 일본 극우와의 연대라니. 확장이 아니라 섬으로 쫓겨가는 양상으로 보아야 정확하지 않을까?


일본 사회는 잘 모르겠다. 겉보기에 건강하고 비판적인 시민사회의 동력이 약해진 것 같다. 그러니까 아베 정권이 저렇게 뭉개고 있는 것이고. 생각 같아서는 일본 내의 시민운동이 활발해지길 바라고, 그 운동을 통해 극우 세력의 준동을 제어하고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공존과 평화의 연대를 펼쳤으면 좋겠다. 얼핏 한국과 일본의 극우 세력들이 결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야합을 추동하는 토대는 한국과 일본 두 사회가 상이하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두 사회의 건강성과 문명성이 갈리지 않을까? 같이 좋아지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이영훈‘들’이 보여준 이 사안은 20세기 이후 한국사회의 험한 역사에서 숨겨졌던 야욕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은밀히 감추고 유지할 수 있었던 부당한 기득권이 민낯을 드러내는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부패검찰, 수구언론, 편파사법, 식물국회를 비롯해서 언제 이렇게 그들의 민낯을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그 야욕이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드러내지 않고도 작동할 수 있던 것이다. 이제 다 드러나기 시작했다. 보이는 적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하나씩 처리하면 된다. 이런 이영훈‘들’에 대해 야유하고 비웃고 조롱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또 강성현이나 나 같은 역사학자들은 연구로 대응할 것이다. 또 나와 친구들, 시민들은 추워도 더워도 촛불을 드는 역할도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영훈‘들’을 소멸시키거나, 그냥 지하에서만 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큰 걱정 안 한다. 긴 역사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실은 점점 밝혀질 것이며, 이해관계가 멀어지면 욕망도 사라지는 법이다. 무엇보다 사람은 죽는다.


처벌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에 대한 대응, 특히 법적 대응에 대한 논의가 민감하다. 나를 두고 저서의 한 장(章)을 할애하여 ‘극우 파시스트’라고 비난한 자가 있었다. 나는 그 책을 보지 않았다. 나와 같이 매도당했던 한 교수가 공동 소송을 제안하였다. 난 사양하였다. 시간도 아까웠고, 소송보다 자정(自淨)이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고민 중인 주제이다. 친구와 상의도 했다. 법을 공부한 친구는 혐오 발언에 대한 처벌에 조심스러웠고, 나는 나치의 역사수정주의 사례를 들어 처벌하자는 쪽에 가까웠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강성현은 마에다 아키라의 논의를 요약하였다. 1) 역사적 진실성 여부, 2) 피해자의 명예, 3) 인간의 존엄성, 4) 차별성 여부를 혐오 발언의 처벌 근거로 소개하였다. 홍성수는 1)의 역사적 진실성 여부를 나머지 셋과 구분하였다고 하는데, 나도 생각이 비슷하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


존엄

〈보론〉에서 조경희는 이영훈의 문장에서는 자료 조사와 증언, 그리고 피해자 지원 활동을 어렵게 횡단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세계적 이슈로 만들어온 사람들과 그 과정에 대한 어떤 존중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는 당연하다. 당초 ‘위안부’에 대한 인간의 안타까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반일종족주의』가 경어(敬語)로 서술된 데 주목한다. 위선(僞善). 비극적 사태에 대한 애도를 모르는 자가 쓰는 존대야말로 가면의 증거일 것이다. 2004년 그때도 그랬다. MBC 심야 토론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상업적인 목적의 공창 매춘부라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자 선량한 선배 안병욱은 그를 데리고 ‘나눔의 집’을 찾았다. 나눔의 집에 있는 ‘위안부 방’에 들어서던 이영훈의 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경멸과 거만. 그래도 나눔의 집을 찾을 때 작게나마 남아 있던 인간다움을 살렸다면 그는 이렇게까지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설

강성현의 책 첫 부분에 이영훈과 함께 진중권이 언급되었다. 관심이 있는 주제(인물이 아니라!)라서 속으로만 생각하던 가설을 소개할까 한다. 급작스러워 보이는, 꼭 그렇지 않더라도 납득하기 어렵게 변신한 인간(특히 지식분자)의 변화에 내가 접근=검토하는 세 가지 방향이있다.


첫째, 그들은 조국과 민족, 세계평화 같은 거룩한 이유 때문에 그렇게 변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밥이나 술 먹을 때 부르지 않거나, 사소한 자기 말을 자르거나 비판할 때 삐지고 그것을 계기로 다른 길을 가는 것 같다. 돈 주는 학술대회에 부르지 않는 것도 삐지는 이유가 된다. 아이들이나 보통 사람들은 잠깐 서운해 하고 말지만, 지식분자들은 이를 빌미로 노선을 바꾸기도 한다.


둘째, 같은 맥락에서, 지식분자가 삐지는 가장 큰 이유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내가 제일 잘난 거 같은데 대접을 안 해줄 때 가장 삐진다. 헌데 그럴 때조차 그들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지나친 대우를 받고 있을 때가 많다. 《논어(論語)》 〈학이(學而)〉 첫머리에 누구나 아는 유명한 문장이 있다. “제때 커리큘럼을 갖추어 학습하면 깊어가는 공부가 정말 즐겁다.[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맘에 맞는 친구가 찾아오면 술 마시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그런데 진짜 중요한 문장은 그 다음에 나온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삐지지 않으면 정말 군자라고 하겠다.[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군자=지식인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셋째, 지식분자는 논리가 한 번 삐끗하면 헤어 나오기가 힘들다. 삐끗한 논리를 합리화할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자아낸 의미, 명분, 논리라는 거미줄에 매달려 버둥거린다. 그들에게 돈 대주고, 방송 출연시켜주고, 무엇보다 그들을 기특하게 여겨 사육하는 극우=매판=역사 부정론자들의 부추김이 있다. 그걸 사랑으로 알고, 그 사랑이 조국과 민족, 자유와 민주를 위한 것이라고 엄숙한 얼굴로 착각한다. 원래 어리석음은 그렇게 죽어가는 법이다.

『라스트 캠페인』: 로버트 케네디의 열광적 선거운동 속으로 책 잡설

* 이 서평은 역개루 카페와 모던아카이브 출판사의 서평이벤트에 응모하여 썼음을 알려 드립니다.

로버트 프랜시스 케네디(이하 RKF)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가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이하 JFK) 대통령의 친동생이자 최측근으로 정실 인사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법무장관 자리에 올랐으며, 쿠바 미사일 사태 당시 소련이 그를 JFK의 핵심 측근으로 파악하고 비선 접촉을 하며 사태를 진정국면으로 접어들게 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RFK는 당시 경험을 다룬 회고록 『13일』을 출간하였고 한국어판으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RFK가 1968년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에 출마했으며 불행이도 암살당했다는 것은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75년에 첫 저작을 출간한 베테랑 미국 언론인이자 논픽션 작가인 서스턴 클라크의 『라스트 캠페인』 (모던아카이브, 2020)은 저의 지적 공백을 매워주기에 좋은 저작이었습니다.

RFK가 대선에 출마한 1968년은 전 세계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서유럽에서는 68혁명이 맹렬한 기세로 사회 곳곳을 뒤흔들었고, 프라하의 봄은 바르샤바 조약군에 진압되었으며, 한반도에서는 1.21 사건과 푸에블로호 피격 등의 북의 무력도발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미국 또한 최악의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전은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이 되었고, 상류계급 사람들은 군복무를 빠져나가며 하층민에게 불리한 징병제도는 격렬한 반전운동을 일으켰으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백인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하며 흑인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2008년에 미국에서 The Last Campaign: Robert F. Kennedy and 82 Days That Inspired America(New York: Holt Paperbacks, 2008)으로 출간된 『라스트 켐페인』은 이 시점에서 RFK는 이 시점에서 민주당 경선출마를 선언한 RFK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저자 클라크는 RFK의 경선출마부터 그가 6월에 암살당할 때까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던 그의 선거운동과 연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RFK가 암살당한 후 미 전국을 뒤덮은 추모 열풍부터 시작하며, 어쨰서 RFK가 그렇게 전국적인 사랑을 받았을 수 있었는지 그의 선거운동 과정을 재구성하며 보여줍니다.

클라크가 중점에 둔 것은 RFK가 보여주는 무모할 정도의 솔직함이었습니다. 클라크의 책에서 재구성된 RFK는 핵심 지지층을 어떻게 챙길 것인지, 민주당의 핵심 표밭에서 기존 표가 이탈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는 솔직히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자신이 믿는 바를 사전에 계산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갈파하였습니다. 빈민가의 끔찍한 현실에 눈돌리지 않고 그곳으로 가서 눈물을 흘리고, 그 또한 백인 도련님에 불과하다며 증오심을 드러내는 흑인들과 한 자리에서 킹 목사를 같이 추모하여 인디애나폴리스의 흑인 폭동을 진정시키고, 대학생의 징병유예를 대학생들 앞에서 비판하며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에 당장 무력보복을 가해야 한다는(아마 푸에블로호 사건 떄문?) 상류층 대학생에게 "먼저 입대하세요."라고 하는 신랄함을 보이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힘들고 짐진 자들의 친구이자, 그들의 삶을 개선시켜줄 수 있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나옵니다.

책 속의 RFK는 절대 보좌진들이 꾸미고 이것저것 고려한 연설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보좌진들의 우려를 살 정도로 즉흥적으로 발언하고, 그것에 마음을 담으며, 뛰어난 유머감각 덕에 반대자들도 비호감을 품지 않게 만드는 사람으로 재현됩니다. 그의 행동은 어느 계층에서건, 그를 위대한 정치인 "바비(로버트의 애칭)"로 보며 찬성하건, 그저 철모르는 이상주의자 도련님으로 보며 반대하건 간에 충분히 진정성 사람으로 비춰지는 모습이 책 속에 드러납니다. 그 점에서 RFK가 정말 책에 묘사된 것처럼 오직 심장만으로 즉흥적으로 행동한 건지, 아니면 그 즉흥성도 극히 정교하게 계산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RFK의 열띤 모습이 책 속에 워낙 생생하게 드러나는지라, 감정이입을 잘 하는 독자분은 책 속의 RFK 지지자들처럼 "바비!", "우리는 바비를 원한다!"를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책은 논픽션이지 연구서가 아닙니다. RFK가 당시 구사한 선거전략과 정책의 현실성에 대한 냉철한 분석보다는, 그가 보여준 열정에 뜨거운 감각을 느끼는 걸 더 선호하는 사람에게 맞는 책입니다. 그만큼 논픽션의 가장 큰 미덕인 현장감을 갖춘 책으로, 당시의 열기를 느끼고 싶은 분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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