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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이글루스를 시작하며




1. 본 이글루는 소련군 작전술의 발전사 연재와 그 참고 문헌들을 번역해 업로드하는 것을 중점으로 삼을 것입니다. 

2. 본 이글루는 대조국 전쟁(독소 전쟁)은 데이비드 M. 글랜츠를, 조선사는 오항녕 교수의 역사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3. 본 이글루는 상당히 소련 편향적인 자료가 많이 올라올 것이고 주인장의 내공이 부족하여 다른 이름 있으신 분들의 피드백이 필수적일 것이라 올라오는 글들을 곧이 곧대로 믿으시면 안됩니다. 

4. 본 이글루는 각주, 미주, 참고문헌 목록의 제시를 좋아합니다




5. 본 이글루는 대륙견공과 환국신민 파시스트들을 사절합니다. 








6. 본 이글루는 소련 편향적이지만 위와 같은 선생들도 사절합니다.

7. 이글루스에 상주하는 묻 이름 있으신 분들과의 교류를 바랍니다. 굽신굽신







이번 플래툰컨벤션에서 제가 번역한 『8월의 폭풍』이 선행판매됩니다. 책 잡설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스베친의 『전략』에 대하여 책 잡설

스베친의 전략론 그리고 작전술

작가
스베친
출판
선인
발매
2018.07.23.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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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거의 대부분의 군대가 군사술을 전략과 전술로만 구분하고 그 중간의 영역을 독일군만이 암묵적으로 체득하고 있던 1920년대, 전략과 전술 사이의 영역을 "작전술"로 규정하며 등장한 군사이론가가 바로 알렉산드르 스베친이었습니다.


제정 러시아군에서 니콜라옙스카야 참모대학을 졸업한 개혁파 장교들의 일원으로 러일전쟁과 1차세계대전을 경험하고 관찰한 스베친은 제정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10월 혁명 이후 붉은 군대에 다른 개혁파 장교들과 함께 군사전문가로 가담했습니다. 잠깐 붉은 군대 주참모장을 맡았다가 참모대학의 교수로 들어와 붉은 군대의 참모장교들에게 전략을 강의한 스베친은 1924년에 참모대학에서 한 강의에서 "군사술을 전략/전술로만 나누는 분류는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군사술을 전략-작전술-전술로 분류하여 작전술 개념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전략에 대한 자신의 이론과 견해를 다듬은 후 1926년에 이제까지의 강의 원고를 모아 편집해 출간하고 1927년에 개정판을 낸 책이 바로 이 『전략』입니다. 스베친은 『전략』과 『군사술의 진화』를 비롯한 여러 저서들에서 독일의 군사사학자 한스 델브뤼크의 영향으로 전략을 "섬멸전략"과 "소모전략"으로 구분했으며, 군사사에서는 소모전략이 적합한 시기(7년전쟁)와 섬멸전략이 적합한 시기(나폴레옹 전쟁)이 있는데 1920년대의 소련은 아직 개발이 더딘 상태와 내전 이후 피해복구의 문제로 인한 산업능력의 제한, 주변국의 안보상황과 군사적 능력을 고려할 때 소련의 광활한 국토 내에서 소모전략을 수행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스베친의 전략관은 종심작전으로 대표되는 공세적인 섬멸전략이 붉은 군대의 최종적인 지향점이라고 주장한 투하쳅스키를 자극했습니다. 결국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이 엥겔스가 아니라 델브뤼크를 인용하는 점을 보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며, 스베친이 소련을 패배로 이끌 소모전략을 주창했다는 이유로 군사대학 교수 9명을 동원해 스베친을 일방적으로 매장한 후 검찰에 고발해 가택연금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패배로 이끌 전략 주창" 죄목은 투하쳅스키가 숙청당할 때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이로서 스베친에게는 "소모전략가"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부당한 비난이었는데, 스베친은 섬멸전략이 필요할 때 섬멸전략을 채택해야 하며,소련이 충분히 산업화되고 기계화 전력을 갖추게 되면 섬멸전략을 채택하는게 적절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택연금 기간은 1년에 그쳤지만 스베친의 저서들은 금서가 되었고 스베친은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스베친은 결국 대숙청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한 채 1938년에 체포되어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베친의 저서는 그 가치를 잃지 않았습니다. 대조국 전쟁은 투하쳅스키가 생각한 소련의 전략적 섬멸공세가 아닌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전쟁이 1944년 중순까지 소련 영토 내에서 진행되면서 소련군은 전략적으로는 스베친적으로, 작전술적으로는 투하쳅스키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스베친의 식견이 투하쳅스키보다 더 적절했던 셈입니다. 이 때문에 전쟁기 주요 사령관들은 전후 사령부에 몰래 『전략』을 숨겨두고 틈틈히 읽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스베친은 대숙청 피해자들이 일괄적으로 복권될 때 복권되었고 금서가 되었던 그의 저작들도 해금되었습니다. 스베친의 『전략』은 보로실로프 참모대학의 교재로 채택되었고 현대 러시아군 참모대학에서도 『전략』은 중요한 교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1980년대 미군의 작전술 개념 도입 과정에서 작전술 개념을 최초로 언급한 단행본인 『전략』은 미국과 영국의 연구자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인용되었고 비공식적으로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그 결과 1992년에 영어판이 민간시장에 출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영어판에는 원문의 이해를 위해 소련군사연구소의 제이콥 킵 박사와 옐친 정부의 안보보좌관인 군사이론가 안드레이 코코신, 소련군 총참모장을 역임했던 블라디미르 로보프의 해설 논문이 달려 있습니다. 이로서 스베친의 『전략』은 소련/현대 러시아만의 군사고전이 아닌 보편성을 지닌 세계적인 군사고전이, 스베친은 세계 대부분의 군대가 채택한 작전술 개념의 창시자로서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스베친은 저서에서 전략과 정치의 관계, 전쟁준비, 작전술을 통한 전략목표의 달성, 전략의 지휘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스베친의 『전략』은 명문화된 작전술 개념의 제시와 더불어 보불전쟁에서 1차세계대전에 이르는 유럽 전쟁의 사례들을 분석하며 전략을 단지 용병의 문제가 아닌 복합적이고 다양한 요소들 내에서 봐야 함을 피력하였습니다. 스베친은 작전술이 전략목표의 달성을 위한 도구임을 강조하였고, 전략-작전술-전술의 관계를 명쾌하게 규정하였습니다. 현재까지 소련 및 현대 러시아의 군사이론 서적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마침내 스베친의 『전략』이 번역된 것은 작전술 개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뿐만 아니라 전략의 연구와 수행에도 한층 기여할 수 있는 계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판은 1927년 러시아어 원본을 바탕으로 번역되었으며 번역자는 러시아어 전공자로 군에서 러시아어를 교육한 분입니다. 아쉽게도 영문판에 있던 본문의 이해를 위한 해설은 들어가 있지 않아서 독해에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 고유명사들이 흔히 쓰는 명사와 다른 점이 좀 많아서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결정의 본질』: 쿠바 미사일 사태 연구의 고전 책 잡설

결정의 본질

작가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
출판
모던아카이브
발매
2018.09.15.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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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에 13일간 벌어진 쿠바 미사일 사태는 전 세계가 핵전쟁의 위험 속에 들어가는 위기국면이었습니다. 이 국면은 갑작스럽게 형성되었고 미국의 U-2기가 쿠바 상공에서 격추되는 등 미소 정면충돌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극적으로 해결되며 세계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으며 재발방지를 위한 미소간 핫라인까지 설치되었습니다.


쿠바 미사일 사태는 세계가 핵전쟁 직전까지 갔다가 빠져나온 사태라는 점에서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국내에도 서강대학교 이근욱 교수의 연구서나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법무장관으로서 당시 의사결정에 관여했던 로버트 케네디의 회고록을 비롯해 관련도서 여러 권이 출간되어 있습니다. 쿠바 사태는 위기의 발발-전개-해소의 국면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훗날 이런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를 던져주었습니다.


1971년에 출간된 하버드 대학 정치학부의 교수 그레이엄 앨리슨의 저서 『결정의 본질』(Essence of Decision)이 관련 연구저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쿠바 미사일 사태에 대해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킨 저서인 이 책은 1971년까지 공개되고 입수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합리적 행위자, 조직행태, 정부정치라는 세 개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쿠바 미사일 사태의 행위자인 케네디를 대표로 하는 미국 측 인사들과 흐루쇼프를 대표로 하는 소련 측 인사들이 어째서 위기상황에 그러한 결정을 내렸으며, 또 위기상황 속에서 각 세부 행위주체(외교관, 고위 장교, 정보기관)은 어째서 그러한 결정을 하고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책은 우선 해석 모델을 제시한 뒤 그 모델에 따라 쿠바 미사일 사태의 전개를 해석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합리적 행위자는 국가의 행위를 "합리적인 개인"의 행위로 보는 모델, 조직행태는 결정과정을 조직문화 및 조직논리와 표준운영절차로 보는 모델, 정부정치는 정부 구성원 간에 이루어지는 정치행위가 결정과정에 끼치는 영향을 보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한 이 책은 지금 국제정치학의 고전으로 남았으며, 미국의 여러 대학 정치학부 및 학과에서 이 책을 교과서로 쓰고 있을 정도입니다.


앨리슨의 3가지 모델은 비단 정부의 국내/국제정치적인 결정뿐만 아니라 군의 작전기획과 결정, 기업경영에서의 결정 및 개인의 상품구매 결정과정까지 해석할 수 있는 폭넓은 해석의 틀을 가져다줌으로서 강한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서 초판은 1971년에 출간되어서 어느 정도는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냉전이 종결된 1999년에 공개된 자료들을 더 추가하여 버지니아 대학교의 필립 젤리코 교수와 같이 저술한 개정판이 출가되었습니다. 모던아카이브 출판사의 판본은 1999년 판본을 원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2005년에 모음북스에서 『결정의 에센스』로 출간되었었지만, 큰 관심을 끌지 못한 상태에서 절판되었는데 올해 재출간된 것입니다.


책은 이 분야의 고전으로 필히 읽어봐야 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비전공자에게는 조금 어려운 편이며 쿠바 미사일 사태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관계로 마이클 돕스의 『0시 1분 전』을 비롯한 다른 책들을 같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이클 돕스의 『1945』 1장 일부 발췌 기타 역사

* 책의 홍보를 위하여 1장의 일부만 발췌해 올립니다.


1장 


루스벨트


몰타섬에 있는 작은 비행장 주기장에서 반짝이는 흰 별이 그려졌고 대형 엔진 네 개가 달린 항공기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의 마지막 임무에 나설 준비를 하며 서있었다. 신형 C-54 스카이마스터 수송기는 휠체어에 앉은 대통령을 기내로 옮길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비롯해 각종 최신 편의시설을 갖췄다. 루스벨트는 휠체어를 좁은 엘리에비어로 미는 경호원에게 불평을 했다.


“이런 건 내가 승인한 적 없는데. 정말 쓸데없어.”


당황한 비밀경호국 요원들은 보안상 필요하다고 했다. 엘리비이터가 없으면 긴 경사로가 잇어야 했고, 그러면 적 스파이가 소아마비에 시달리는 미국 대통령의 출발과 도착을 미리 알게 될 터였다. 그럼에도 쓸데없는 호들갑과 예산 낭비를 싫어하던 루스벨트는 엘리베이터가 탐탁치 않았다. 


출발 일정은 공연을 연출하듯이 세심하게 기획됐다. 군용기 30대가 작은 관제탑 옆에 도열해 이륙 허가를 기다렸다. 10분 간격으로 맨 앞에 있는 항공기가 창문을 가리고 외등을 모두 끈 채 컴컴한 활주로 끝으로 이동했다.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지중해 하늘로 이륙하면 다음 비행기가 그 자리로 이동해 이륙 준비를 했다. 이날 밤은 엔진을 예열하는 미군 스카이마스터, 영국군 요크 수송기, 주변 상공을 맴도는 전투기의 굉음으로 시끄러웠다.


대통령 전용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프로젝트 51’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전용기 제작은 극비였다. 극소수의 관계자들은 전용기를 ‘신성한 소’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2년 전인 1943년 1월 루스벨트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비행기로 여행한 대통령이 되었다. 처칠과 회담하기 위해 팬아메리칸 항공사의 수상비행기를 타고 카사블랑카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전쟁 중에 대통령이 민항기로 이동하는 것은 확실히 불편했다. 특히 하반신이 마비된 대통령에게는 더 그랬다. 그렇게 “하늘의 백악관”이 첫 비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1945년 2월 2일 밤 11시 15분 루스벨트는 ‘신성한 소’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새벽 3시 30분에 이륙할 예정이었다. 대통령 주치의는 루스벨트가 기내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대통령은 날개 바로 뒤에 있는 특등실로 옮겨졌다. 흑인 집사 아서 프리티먼은 대통령이 옷을 갈아입고 대통령 문장이 그려진 3인용 소파에 편히 눕게 도왔다. 특등실에는 흔들의자, 회담용 테이블, 옷장 및 개인용 화장실, 일반 항공기 창문에 비해 폭이 두 배에 파란색 커튼이 달린 파노라마식 방탄유리창 같은 편의시설이 있었다. 창가에 설치된 인터폰으로 조종석을 비롯해 기내의 다른 곳과 연락할 수 있고, 안쪽 벽에는 비행 중 브리핑에 쓸 수 있는 롤스크린 지도가 여러 장 구비되었다. 소파 바로 위 벽면에 그려진 파도를 뚫고 나가는 19세기 범선은 루스벨트의 바다 사랑을 환기시켰다.


만성 피로에 시달린 대통령은 지난 12일 동안 미 해군 순양함에 타고 대서양을 건너면서 매일같이 각종 카드 게임을 하고 저녁에는 영화를 관람했다. 하룻밤에 12시간 자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쉬어도 충분해 보이지 않았다. 지난 선거 유세 당시 뉴욕에서 오픈카를 타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유세를 하느라 남은 에너지 대부분을 소진했다. 4선 임기를 버틸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선거 유세는 루스벨트가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그대로, 강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졌으며 낙관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집중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것을 숨긴 것이다. 루스벨트는 수개월 사이에 체중이 20킬로그램 가까이 줄어 뼈만 남은 듯 보였다. 어떤 경우에는 혈압이 150을 넘어 260까지 치솟을 만큼 불안정했다. 해리 S. 트루먼 부통령은 백악관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루스벨트를 만났을 때 깜짝 놀라 보좌관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대통령이 그렇게 허약해진 줄 몰랐네. 차에 크림을 붓는데, 찻잔에 붓는 양보다 흘리는 양이 더 많더군. 정신은 멀쩡해 보이지만 몸이 완전히 망가졌어.”


루즈벨트의 심장주치의 하워드 브루언은 이륙 직후에 대통령실로 들어갔다. 대통령은 이미 코를 골고 있었다. 젊은 해군 소령인 브루언은 ‘신성한 소’가 활주로에서 속도를 올리는 동안 대통령이 소파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 루스벨트는 소파에서 떨어지지 않게 버틸 체력도 없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브루언은 흔들의자의 등받이를 소파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뒤에서 날지 모를 소음에 주의하며 의자에 앉아서 잘 작정이었다.


브루언은 루스벨트의 상태를 걱정했다. 1944년 3월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대통령을 처음 진찰했을 때, 무언가 “끔찍하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고는 1년 이상 살 수 없다고 진단했다. 대통령은 호흡곤란과 급성 기관지염에 시달렸다. 심장은 심하게 확장되고 혈액 순환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브루언은 심장병 약재인 디기탈리스를 처방해 주었다. 식단을 소화가 잘되는 음식으로 바꾸고, 휴식 시간을 크게 늘리며, 업무와 공식적인 접견 인원수도 대폭 줄이게 했다. 루스벨트의 수석 주치의 매킨타이어 중장은 대통령의 일상 스케줄을 방해하기 싫어 처음에는 브루언의 권고를 거부했으나 결국 일정을 줄였다. 매킨타이어의 요구로 대통령의 실제 몸 상태는 백악관의 믿을 수 있는 소수에게만 알려졌다. 루스벨트 본인에게도 비밀이었다. 기분 나쁜 소식을 싫어한 루스벨트는 자신의 진짜 건강 상태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대통령은 ‘신성한 소’가 이륙하면서 내는 엔진 굉음과 기체 진동 때문에 깼다. 코와 목이 단단히 막혔다. 브루언은 등 뒤에 있는 루스벨트가 소파에서 뒤척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브루언은 진료일지에 루스벨트가 전용기에서 “소음과 진동 때문에 자주 깸”이라고 적었다. 이 점을 제외하면 “환자”는 예상보다 잘 지냈다. 루스벨트는 미국을 떠난 뒤 2주간 자동차, 기차, 배, 비행기를 이용한 여행을 “철저히” 즐겼고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에도 “아침 늦게까지 자고, 오후에는 휴식을 취했으며, 꽤 거친 파도에도 꽤 일찍 취침했다.”


지중해의 중앙에 있는 몰타섬을 이륙한 ‘신성한 소’는 동쪽으로 시속 약 320킬로미터로 날아갔다. 여압 설비를 갖추지 못한 전용기는 주치의들의 요구에 따라 고도 6000피트를 유지해야 했다. 가급적 대통령의 호흡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용기는 구름을 뚫고 지나가는 동안 요동쳤다. 몰타섬을 출발한 지 한 시간쯤 뒤 기상 상태가 불안정했다. 비밀경호국 파견대장은 대통령 침실에서 나는 소음을 듣고 확인하러 갔지만 그저 문이 앞뒤로 흔들리며 나는 소리였다. 조종사는 독일군이 그때까지도 부분적으로 점령한 크레타섬을 피하기 위해 항로를 북동쪽으로 바꿨다.


‘신성한 소’는 동틀 녘에 아테네 상공을 통과했다. 비행기 좌측에서 아테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P-38 전투기 여섯 대가 구름을 뚫고 나타나 에게해를 건너 눈 덮인 그리스 북부와 터키를 지나 최종적으로는 흑해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를 호위했다. 루스벨트의 딸 애나는 그리스의 섬을 구경하려고 일찌감치 깼다. “아름다운 일출”과 “작은 마음의 윤곽”을 빼면 황량했다. 모든 탑승객은 전날 밤에 시계를 두 시간 빠르게 맞추라는 지침을 받았다. 대통령은 착륙 한 시간 전에 옷을 입고 아침식사로 늘 먹는 햄에그를 대접받았다.


연합국 항공기는 소련 영공에 진입하면 90도로 방향을 틀어 아군기라는 신호를 보내는 동시에 소련군 대공화기에 격추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신성한 소’는 크림반도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유파토리아를 출발하는 철도와 나란한, 약속된 항로를 비행하며 사키 비행장으로 향했다. 눈 덮이고 단조로운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전투기 한 대가 엔진 문제로 되돌아가고 이제 다섯 대의 호위를 받는 대통령 전용기는 활주로 위를 한 바퀴 돌다가 예정대로 모스크바 시간 12시 10분에 “콘크리트 블록으로 만든 짧은 활주로에서 줄곧 덜컹거리며” 착륙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12년간 미국을 대공황의 수렁에서 구하고, 주저하던 미국인을 설득해 궁지에 몰린 영국을 지원했으며,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연합군을 결성했다. 이제 두 개 전쟁 모두 승리를 눈파에 두고 있다. 연합군은 독일 국경에 도달하고, 일본군도 아시아의 점령지에서 내몰렸다. 죽음을 앞둔 군통수권자인 루스벨트는 4선 임기를 시작한지 불과 이틀 뒤에 위험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자살이라 다름없는 해외순방에 나섰다. 자신이 집착하는 마지막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루스벨트는 미국인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승리하고 싶었다. 그리고 3년간의 전쟁으로 지친 미국인에게 “항구적 평화”를 이미 약속한 상태였다.


1945년 2월 3일 루스벨트는 크림반도에 도착했다. 현직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땅을 밟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후 약 30년 동안 미국 대통령은 소련을 방문하지 않았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는 급변했다. 미군은 러시아 북부의 숲 속에서 백위군 편에 서서 붉은군대와 싸우다가 사상자 2000명 이상을 내고 아르한겔스크에서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1939년에 스탈린이 히틀러와 담압해 폴란드를 분할하고 핀란드와 발트 3국을 침략하자 미국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고, 불과 몇 달 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문턱에 도달하자 미국 여론은 완전히 바뀌었다. 같은 해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공산 러시아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군사동맹국이 되었다. 헐리우드 영화는 소련을 용감한 군인, 삶에 만족하는 노동자, 미소 짓는 정치장교의 땅으로 그렸다. 1939년에 히트한 영화 <니노치카>에서 그려진 것과는 것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소련군의 승리가 거듭될수록 강하지만 자비로운 지도자가 이끄는 용감하고 믿을 만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확대되었고, 루스벨트 행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러시아를 직접 체험한 일부 외교관을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나오기는 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해리먼은 러시아라는 곰이 “국제적 불량배”로 바뀌고 있다며 불평했다. 해리먼은 스탈린이 동유럽에 배타적으로 통제할 “영향권”을 두기 위해 “무력 수단”을 쓸 것이라고 우려했다. 해리먼 밑에서 대사대리직을 수행한 조지 케넌도 유럽 분할은 불가피하다며 동의했다.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공통의 적만 있을 뿐이다. 얄타회담 전날 케넌은 친구인 찰스 E. 볼렌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 정부가 지정학적 현실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왕이면 모스크바와 적절하고 확실하게 타협을 하는 게 어떨까? 유럽을 노골적으로 각각의 영향권으로 나누어서 상대의 영향권을 건드리지 않는 거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크림반도에서 스탈린과 윈스턴을 만나기 위해 목숨 건 여행을 하는 루스벨트로서는 러시아와 유럽을 나눌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대부분의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루스벨트도 “제국”이나 “힘의 균형”, “영향권” 같은 것을 혐오했다. 루스벨트의 원대한 계획에서는 승리한 연합국의 친절한 감독하에 새로운 국제기구가 “항구적 평화”를 책임질 터였다. 대통령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군이 최대한 빨리 복귀하기를 원했다. 


스탈린은 루스벨트를 영접하러 사키에 오지 않았다. 그 대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부 장관을 보냈다. 털가죽 모자를 쓰고 두터운 코트를 입은 몰로토프는 연합국 관리들에 둘러싸여 활주로에서 서성거렸다. 루스벨트와 애나는 대통령실 창문으로 러시아 여성들이 자작나뭇가지로 만든 빗자루로 활주로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따뜻한 기내에서 20분 뒤 처칠이 탄 C-54 스카이마스터가 P-38 전투기 여섯 대의 호위를 받으며 착륙하는 것을 지켜봤다. 처칠이 탑승한 C-54는 미국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원래 루스벨트와 처칠은 얄타에 30~35명 정도의 핵심보좌관만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관료가 자신을 “없어서는 안될” 인원으로 여기는 바람에 결국 대표단 규모는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러시아인들은 장작난로로 난방을 한 대형 군용 텐트를 쳐서 수많은 군 장성, 장관, 외교관을 비롯한 수행원의 편의를 제공했다. 새로 도착한 손님은 큼직한 캐비아 덩어리와 강한 마늘향을 풍기는 햄, 훈제연어, 계란, 사워크림소스를 얹은 커드케이크, 달콤한 샴페인, 조지아산 화이트와인, 보드카, 크림반도산 브렌디로 이루어진 러시아에서의 첫 아침식사와 함께 따끈하게 데운 차를 대접받았다.


마침내 모든 인원이 환영식장에 모였다. 비밀경호국 요원들은 엘리베이터로 대통령을 내린 다음 양탄자가 깔린 오픈형 지프에 태웠다. 미국이 랜드리스로 소련에 원조한 지프였다. 소련 군악대는 미국 국가 ‘성족’, 영국 국가 ‘신이여 국왕을 구원하소서’, 소련의 새로운 국가 ‘위대한 레닌이 앞길을 비추고 스탈린이 우리를 인민에게 봉사할 자리로 올려주네’를 연주했다. 진한 남색 망토를 두른 루스벨트는 지프에 탄 채 거위 걸음으로 행진하는 의장대를 사열했고 처칠과 몰로토프가 루스벨트 옆에서 걸었다. 처칠이 보기에 루스벨트는 “노쇠하고 병들과 매우 불쌍해 보였다” 얼굴이 백지장 같이 하얗고 피부라기보다 밀랍처럼 보였으며 힘이 없었다. 오른팔은 지프의 옆에 걸쳐졌고 손도 축 늘어졌다. 처칠의 주치의 찰스 모란은 이렇게 회고했다.


“총리는 마치 빅토리아 여왕의 말년에 인도인 수행원이 마차를 따라다니는 듯 대통령 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 앞에는 사진을 찍기 위해 뒷걸음질 치는 수많은 카메라맨들이 몰렸다. 대통령은 늙고 야위고 핼쑥했다. 어깨에는 숄이나 망토 같은 것을 걸쳤는데 쪼그라든 듯했다. 무언가를 입에 넣기라도 하듯, 입을 벌린 채 정면을 보고 앉아있었다. 다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이 일은 그 뒤로 구설수에 올랐다.”


애나 루스벨트는 아버지가 “좀 걱정됐다.” 아버지가 “어제 힘든 하루를 보냈고, 비행기에서 조금 밖에 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얄타까지 다른 수행원들 없이 자기만 대통령과 함께 차에 타서 “아버지가 원하는 만큼 자고 다른 이들과 말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해질 무렵까지 얄타에 도착하려면 곧장 출발해야 했다. 두 사람은 제공된 다과도 마다한 채 스탈린의 패커드 리무진 중 한 대에 올라탔다. 동행 인원은 미국 경호원 한 명과 러시아 운전수 한 명뿐이었다. 차는 곧 “황량한 스텝”으로 출발했다. 차량 여러 대에 미국 비밀경호국 요원과 “무장한 러시아인”이 나눠 타고 대통령 차량 앞에서 달렸고, 나머지 미국과 영국 대표단 인원이 탄 차량이 긴 행렬을 이뤘다.


루스벨트는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크림반도 상황에 대한 우려할 만한 보고를 잇달아 받았다. 대통령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는 처칠이 “현지가 상당히 불편하리라고 예상한다”고 보고했다.


“처칠은 10년 더 조사해도 얄타보다 나쁜 곳을 찾기는 힘들겠지만 적절한 양의 위스키를 가져가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 동네에 창궐하는 티푸스와 이에 특효약이라고 하는군요.”


이틀 뒤 처칠의 전보가 도착했다. 사키와 얄타 사이에 있는 도로가 눈보라로 통행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영국과 미국 선발대는 회담장으로 가는 길에 이용할 “산악로”를 협의하면서 “아주 끔찍한 경험”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 차량의 통행은 금지되었고, 약 130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는 180미터 간격으로 배치된 수많은 소련 내무부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병사 중 다수는 남자처럼 긴 코트와 가죽벨트를 차고 어깨에는 “미군 제독이 착용하는 것 같은” 견장을 단 채 기관단총을 등에 맨 여성이었다. 처칠의 여성 보좌관 중 한 명은 집에 보낸 편지에 놀라움을 담아서 말했다.


“러시아 여성은 덩치가 크고 억세며 다리도 제가 본 사람 다리 중에 가장 길었어요. 독일놈들이 왜 살려두지 않았는지 알 것 같네요.”


러시아 병사들은 대통령이 지나가면 대통령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받들어 총 자세를 취했고, 다른 모든 차량에도 같은 자세를 취했다. 


도로에는 독일군이 크림반도를 30개월간 점령한 흔적이 줄줄이 이어졌다. 폐허가 된 건물과 불탄 전차, 뒤집어진 화물열차, 버려진 마을, 부상병이 있었고 특히 도시 안에 부상병이 많았다. 루스벨트는 코벤트리와 로테르담에 대한 공습과 바르샤바와 리디체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한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지만 나치의 파괴행위를 직접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은 루스벨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루스벨트는 그런 끔찍한 광경이 독일에 “되갚아주자”는 생각을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들게 했다고 딸 애나에게 말했다. 루스벨트보다 차량 몇 대 뒤에서 이동하던 처칠은 “끝없고 매우 지루한” 자동차 여행을 대놓고 불평했다.


“출발한 지 얼마나 됐지?”


“한 시간쯤이요.”


딸 사라 처칠이 대답했다.


“맙소사! 이렇게 다섯 시간을 더 가야 하다니!”


사라는 다음 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버지의 기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황량한 시골길을 몇몇 우울한 얼굴의 농부를 지나쳐 끝없이 가고…. 용기와 인내와 아주 좋은 브랜디 한 병으로 버티며 끝없이 달렸지요!”


처칠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바이런의 서사시 『돈주앙』을 일행에게 읊었다. 연합국 차량 행렬은 “길이 넓고 곧은, 또 다른 음침한 도시” 심페로폴을 통과한 뒤 산악 지대를 오르기 시작했다. 바깥 경치는 더 다채로워졌지만 여전히 매우 황량했다. 쪽잠을 자다가 간간히 깨어 창밖을 본 루스벨트는 관목은 있어도 “상록수가 거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는 업스테이트 뉴욕의 허드슨강 계곡에 있는 자신의 고향도시 하이드파크에 심은 나무 30만 그루를 떠올렸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을 만나면 “이곳에 삼림녹화 사업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기로 다짐했다.


이제 오후 3시가 지났고 루스벨트 부녀는 배가 고팠다. 두 사람은 전날 대서양을 건널 때 탄 순양함 퀸시에서 만든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래기 위해 길가에 멈췄다. 그때 해리먼 대사가 차를 타고 달려와 몰로토프 장관이 45분만 더 가면 나오는 알루시타라는 해변도시의 휴게소에 대표단 전체를 위한 점심을 준비했다고 보고했다. 식탁이 “음식과 와인으로 신음할” 정도였다. 소련 측은 휠체어를 탄 대통령을 위해 멋진 양탄자를 깐 경사로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루스벨트에게 두 시간에 걸친 식사와 음주는 무리였다. 루스벨트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얄타에 도착하길 원했다. 처칠(애나의 표현에 따르면 “그 늙고 단호한 새”)은 언제나 그렇듯 왕성한 식욕으로 음식에 달려들었다.


알루시타를 지난 후에는 이동로가 로마노프 도로를 따라 내륙 방향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로나모프 도로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가 사냥터가 딸린 여름궁전까지 가기 위해 닦은 것으로, 황제의 운명을 가른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1년 전에 완공되었다. 경치가 더욱 극적으로, 심지어 로맨틱하게 바뀌었다. 약 1500미터까지 솟아오른 산, 넓게 펼쳐진 험준한 바위와 급류, 울창한 자작나무와 소나무 숲이 보였고 산비탈 쪽으로 수많은 도로가 지그재그로 뚫렸다. 일반 차량의 통행이 전면 통제된 것은 다행이었다. 이곳이 선발대가 경고한 좁은 “산악도로”였다. 대통령의 해군보좌관 윌슨 브라운 중장은 이렇게 말했다.


“커브 길이 짧고 급격했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벼랑 끝에는 가드레일도 없었다. 방향이 계속 바뀌면서 승객들이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졌다. 벼랑 끝에서 간신히 물러났다 싶으면 금방 아슬아슬하게 또 벼랑을 피했다. 비포장도로를 지나는 내내 차가 덜컹거렸다.”


갑자기, 대통령 일행은 마지막 산악도로에서 “다른 나라”에 도착했다. 편백나무와 포도밭과 붉은 기와지붕의 주택이 짙고 푸른 바다를 등지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날씨가 거의 지중해처럼 상쾌했고 향긋한 올리브나무와 오렌지덩굴 냄새가 풍겼다. 짧은 구간의 해안 지대를 주변의 산이 러시아에서 불어오는 혹독한 북풍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쌓인 눈도 없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다들 기분이 좋아졌다.


오후 6시 무렵 어둠이 드리울 때 루스벨트가 탄 리무진은 소나무, 야자나무, 편백나무가 줄지어 선 진입로에 접어들었다. 길게 늘어선 장미와 협죽도가 갈라지면서 바다 위 70여 미터 높이의 절벽에 거대한 르네상스 양식의 별장이 드러났다. 루스벨트가 방문한 곳은 니콜라이 2세가 즐겨 찾은 휴양지 리바디아 궁전이었다.


“도대체 처칠이 왜 걱정했는지 알 수 없군. 아주 안락한데 말이야.”


루스벨트가 방을 160개나 갖춘 궁전의 1층을 휠체어로 오가며 말했다. 소련 측은 대통령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래층 방 대부분에서는 거대한 장작이 난로에서 활활 타고 있었다. 궁전 책임자는 루스벨트를 “몇 차례나 허리를 굽히며” 맞이했고 “각하”라고 불렀다. 독일군은 리바디아 궁전을 철저히 약탈했고, 나중에 궁전을 탈환한 소련은 한 달간 화물열차차량 수백 대로 모스크바에서 싣고 온 물자로 황급히 수리했다. NKVD 요원 수천 명과 소련군 병사를 동원해 벽에 페인트를 칠하고 배관을 복구했다. 주변경관을 차르 시절의 웅장한 수준으로 복구하는 데 루마니아군 포로도 투입했다. 침구류와 식기류를 포함한 주요 집기는 웨이터, 요리사, 하녀와 함께 모스크바의 1급 호텔에서 옮겨왔다. 소련 측은 그때까지도 얄타를 비롯해 인근 도시에서 “뎐도용 거울, 옷걸이, 세숫대야”같은 집기를 닥치는 대로 모으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현관홀과 붙은, 흰 대리석 기둥이 받쳐진 거대한 연회장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에는 루스벨트과 스탈린·처칠과 회담할 때 이용할 원탁이 이미 준비됐다. 루스벨트가 사용할 방도 본청과 연결된 동에 마련됐다. 그곳 역시 현관활에서 갈라지고, 주변에 무어인 양식의 정원이 있었다. 침실과 식당은 미국 선발대 중 한 명이 “초기형 풀먼 객차” 스타일이라고 묘사한 분위기로 꾸며졌다.


“묵직하고 커다란 그림이 마호가니 벽에 걸려있었다. 긴 술이 달린 오렌지색 비단 갓이 드리워진 황동 램프가 테이블에 놓여있었고, 부하라풍 카펫과 중동 양식의 녹색 쿠션이 바닥 곳곳에 놓여있었다. 이곳저곳에 둔하게 생긴 서랍장, 소파, 테이블, 의자 사이에서 소련 측이 이번 행사를 위해 어렵게 구한 제정 러시아 시대의 멋진 가구가 눈에 띄었다.”


주최 측은 지난 며칠간 양탄자와 그림을 대통령의 침실 안팎으로 옮기면서 “어떤 동양적 색깔이 가장 보기 좋은지” 따져봤지만 결정하지 못했다. 식탁도 방 이곳저곳에 옮기기를 반복하며 어ᄄᅠᇂ게 세팅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루스벨트는 그보다는 백악관에서 신성시하는 의식인 저녁 일과에 더 신경을 썼다. 긴 하루 일과가 끝난 뒤 친구들과 “아이들의 시간”이라고 부른 휴식 시간을 가졌는데, 진·베르무트·올리브와 소금물에 얼음을 잔뜩 담아 각테일 셰이커에 섞어서 즐겼다. 여기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러 간 애나는 얼음이 없다는 걸 알고 크게 실망했다. 궁전 책임자는 마티니 대신 “온갖 것을 뒤섞은” 듯한 “달콤한 혼합물”을 제안했다.


대통령 일행은 곧 칵테일을 포기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차르의 당구장에 앉았다. 애나는 그날 밤을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얼마 안 가 우리의 작은 잔이 보드카로 가득 찼다. 맛있는 캐비아를 대접받았다. 익히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보존처리된, 나처럼 어지간히 비위 좋은 사람이라도 먹기는 좀 어려웠던 저민 생선도 먹었다. 사냥한 동물로 만든 코스 요리가 나왔고, 다음에는 감자와 함께 꼬치에 꿰인 어떤 고기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디저트 두 종류와 커피,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디저트가 딸린 샴페인, 독한 술이 나왔다. 우리가 뭔가를 거절하면 궁전 책임자는 마치 천둥번개라도 만났거나 치명상을 입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루스벨트는 저녁식사 뒤 침대에 누웠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음 날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해리먼 대사는 미소 정상회담을 조율하기 위해 20분 떨어진 곳에 있는 스탈린의 본부에 파견되었다. 처칠과 루스벨트는 몰타섬에서 크림반도로 날아오기 전날을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대통령 특별보좌관인 해리 홉킨스는 두 정상이 본회담 전략을 짜기 위해 사전에 꼭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홉킨스는 불안감에서 활력을 얻는 유령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 기간 대부분을 대통령과 총리의 반영구적 집안손님으로서 런던과 워싱턴을 오가며 보냈다. 루스벨트와 이 ‘특별보좌관’의 관계는 예전만큼 가깝지는 않았다. 홉킨스는 1943년 말에 세 번째 결혼을 한 뒤 백악관을 떠났다. 그럼에도 사회사업가 출신인 홉킨스는 여전히 막대한 권력을 누렸고, 대통령에게 대놓고 비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보좌관 중 하나였다.


애나는 상대가 영국 총리일지라도 불필요한 회담은 가급적 줄이고 싶었다. 애나는 대통령 침실에서 문 두 개 정도 떨어진, 청소용구 수납장만한 방에서 침대에 누운 홉킨스를 목격했다. 홉킨스는 창백하고 초췌한데다 초조했다. 홉킨스는 위암에 더해 지나치게 기름진 음식 수면부족, 특히 과음으로 인한 “끔찍한 설사병”에 시달렸다. 이틀 전 아직 미국 대표단이 순양함 퀸시에 타고 있을 때 홉킨스는 배에 남은 마지막 위스키병을 비웠다. 홉킨스가 어찌나 자주 “비행”을 저질렀는지 설사약도 쓸모가 없을 지경이었다. 해리먼 대사의 딸 캐슬린에 따르면 의사들이 홉신스에게 “시리얼만 먹으라고 처방했는데도, 그 바보는 캐비아를 큼직하게 두 스푼 먹고 사워크림을 얹은 양배추수프까지 먹은 뒤에야 시리얼을 먹었다.”


홉킨스는 영미간 사전 정상회담을 하면 “러시아 친구들”의 불신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애나의 주장을 무시했다. 다음 날 아침 대통령과 총리는 “무조건” 만나야 했다.


홉킨스는 루스벨트가 “이 일을 자청”했다며 쏘아붙였다.


“대통령께서 원하시건 아니건, 그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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