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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이글루스를 시작하며




1. 본 이글루는 소련군 작전술의 발전사 연재와 그 참고 문헌들을 번역해 업로드하는 것을 중점으로 삼을 것입니다. 

2. 본 이글루는 대조국 전쟁(독소 전쟁)은 데이비드 M. 글랜츠를, 조선사는 오항녕 교수의 역사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3. 본 이글루는 상당히 소련 편향적인 자료가 많이 올라올 것이고 주인장의 내공이 부족하여 다른 이름 있으신 분들의 피드백이 필수적일 것이라 올라오는 글들을 곧이 곧대로 믿으시면 안됩니다. 

4. 본 이글루는 각주, 미주, 참고문헌 목록의 제시를 좋아합니다




5. 본 이글루는 대륙견공과 환국신민 파시스트들을 사절합니다. 








6. 본 이글루는 소련 편향적이지만 위와 같은 선생들도 사절합니다.

7. 이글루스에 상주하는 묻 이름 있으신 분들과의 교류를 바랍니다. 굽신굽신







C. J. 딕, <연합군과 소련군의 작전술 비교>-끝 인용할 자료들

붉은 군대의 1944년 하계공세는 작전수행의 치밀함을 보여주었고 전술에서도 필요하면 절정에 달했다. 스타브카는 10개 전선군 전체가 실시하는 동시다발적인 전구 수준의 공세를 할 만큼의 자원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행동과정은 많지만 결정적이지 못한 작전들이 되어 결국 소모전으로 추락할 것이었다. 스타브카의 전략적 결심은 그래서 신중하게 순서를 둔 일련의 전략적 공세작전이 되었다. 각 공세작전에는 마스키롭카(기만)가 선행되고 동반되었으며 작전술-전략적이거나 작전술적 수준의 전력집중으로 적 종심으로 공세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우세를 가지게 되었으며 집중과정은 은폐되었다. 각 작전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목표를 장악하는 사전조건으로 적의 핵심적이고 특정한 집단을 섬멸하도록 계획되었다. 모든 작전은 스타브카가 직접 지도하고 감독하여 2개나 3개 전선군이 밀접한 공조를 이루었다. 이러한 작전들은 신중하게 계획되었다. 모든 작전목표 달성시간이 목표일을 초과하여 달성되었고, 손실도 크게 없었다. 그래서 소련군은 작전 중에 새로운 게획을 계속 실행하여 종심 깊이 있는 새로운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작전술적 중단 없이 작전을 수행했다. 각 작전에서 전선군 제2 제파(벨로루시 작전 중에 다른 전선군에서 배치된 부대들)은 작전 투입 때 전력과 유연성을 유지하고 종심 깊이 있는 목표를 탈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월에 개시된 사전 작전은 핀란드군을 레닌그라드 인근에서 쫓아버렸고, 7월에 헬싱키를 목표로 한 "계속되는 작전"은 실패했지만, 지친 핀란드에게 유리한 강화조건을 강요할 수 있었다. 이 작전 일정과 겹치거나 후속 작전이 3개가 시작되었다. 6월 23일부터 2주간 계속된 작전에서 4개 전선군이 전과확대를 하여 독일 중부 집단군을 가장 강력하고 손실도 최소한인 연속적인 공격으로 섬멸했다. 독일군은 재앙의 크기를 줄이려고 소련군의 주공이 될 거라고 믿었던 남쪽에서 작전 예비대를 필사적으로 끌어왔다. 이로서 전력이 약해진 독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은 (262쪽) 소련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7월 중순에 개시한 두 번째 공세에 취약해졌다.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세는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의 방어를 깨트리고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좌익이 당시 독일군 방어가 불안정해진 중부에서 루블린-브레스트 작전을 시작할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세 번째 타격은 기갑전력이 거의 없던 독일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을 상대로 8월 하반에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실시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으로 2주도 안되어서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이 섬멸당했으며, 루마니아 전체를 공략할 길과 그 뒤로 불가리아와 헝가리 동부를 공략할 길이 열렸다.


각 작전에서 전선군이나 야전군 수준에서 성공의 열쇠는 소련군 교범 저자들과 그 실행자들이 중시한 속도와 종심이었다. 두 핵심은 기습과 집중으로 달성하였다. 적 방어를 독일군의 예비대와 다른 구역에서 온 병력이 방어의 안정을 회복하지 못하게 돌파해야 했다. 전술적 돌파는 작전술적 성과를 전략적 성과로 중단없이 전환해야 했다. 정의 제1 단계는 종심전투였다. 종심전투는 기계화 부대가 전개한 기동 전술부대인 선견대가 개시했다. 소총병 부대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선견대를 더 운용했다. 선견대는 침투와 급속하고, 유연한 기동을 하기에 적절한 작은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동은 더 큰 부대로는 실시하기 힘들었다. 성공은 제병협동군 소속의 전차군단이나 기계화군단이 자주 이끌었다. 전술적 국면의 개시는 전선군 수준의 기동집단이 수행하는 종심작전으로 마찰 없이 발전되었고, 선견대는 계속 적지 종심을 탐색하며 적의 방어 기동을 제한하고, 적의 이동을 방해했다. 이 전차군들과 기병-기계화 집단들은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극대화시키고, 적의 기도를 차단하며, 종심 깊이 돌파구를 넓히고 적이 가진 자원을 제거해 적시에 적을 파국으로 몰아넣도록 하였다. 작전 전체는 기동전의 성격을 띄었다. 독일군은 붕괴되고 응집력과 사기가 저하되며 항상 너무 늦게 대응했고 항상 너무 적은 전력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대응은 소련군의 노력에 영향을 끼치기에는 물론 너무 분산되었다. 게다가 높은 진격속도와 적의 대응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최대의 공세 추진력과 함께 공세집단의 활력이 계속 연장되었다. 전차군들의 속도가 하루 당 거의 16에서 45 km로 4배가 되었고, 탄약과 연료 소모율은 각각 6분의 5와 3분의 1로 떨어졌다. 그리고 인력과 전차의 손실율은 각각 70%와 35%가 감소했다. 소모율에는 효과적인 방어 돌파와 무너진 적을 추격하는 임무 간에 차이가 있었다. 속도와 기습은 측방과 후방 방호에 들어가는 자원도 투입해서 달성했다. 하지만, 만약 적이 (263쪽) 작전술적 수준의 반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집결하는 데 성공하면, 공세가 자주 끝났으며, 제병협동군들은 기동집단 뒤에서 1-2일 거리 정도로 뒤쳐졌고 선견대는 그보다 더 멀리 뒤쳐졌다. 게다가 공세 주력에는 제2 제파가 아직 투입되지 않은 상황이 많았다. 작전을 제약하는 주요 오소는 군수보급의 안정성이 되었다.


전과확대와 종심작전의 발전에서 나온 어려움은 그 실행에서 더 커졌다. 대부분의 소련측 자료들이 당시에 나온 많은 오류들을 지적하고 있다. 작전기획에서 중대한 실수가 나온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제3 벨로루시 전선군의 기동집단인 제5 근위 전차군은 벨로루시 작전 개시 때 잘못된 장소에 배치되었다. 제5 근위 전차군은 더 공세가 용이한 축선인 북쪽으로 재배치되어서 작전 투입 시기가 예정보다 1-2일 정도 연기되어서 보리소프 구역의 베레지나에서 공세 지연과 적지 않은 손실을 가져왔다.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에서 바라노프 기병-기계화 집단은 전과확대에 투입되었는데 기병의 취약성 때문에 제1 근위 전차군이 전과확대에 더 알맞았다. 그래서 제3 근위 전차군이 제3일차에 전투에 투입되었는데 이는 전술 방어지대 때문이 아니라 전선군 사령부가 전과확대를 시작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 계획은 실패했고 그 결과 콜토프 회랑이 좁아졌다. 총참모부의 전훈 연구들은 돌파를 달성하면 제병협동군의 기동집단들, 가끔 전선군 수준이 기동집단들이 적의 저항을 우회하여 소총병 부대들보다 더 앞서서 진격하는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경향을 한탄했다.


그러한 비판은 명백했지만, 실수에는 정당한 이유들이 있었다. 전과확대 전력을 투입하는 지휘관들은 기습의 효과와 주도권을 잡기 위한 초기의 추진력을 잡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전과확대 전력을 너무 일찍 투입했다. 이와 비슷하게 작전 과정에서는 조급함으로 인한 결과가 항상 나왔다. 그 사례는 제3 근위 전차군을 후속해 콜토프 회랑으로 돌입하던 제4 전차군에서 나왔다. 제4 전차군은 더 성공적인 북쪽 축선으로 전과확대를 위해 투입되지 않았다. 다른 경우는 독일 제6군의 일부 병력이 8월에 프루트 강에서 탈출하도록 허용해 준 포위망의 틈이 있었다. 이 틈은 포위된 적을 섬멸하는 과정이 지연되며 나타난 것이었다. 소련군 지휘관들이 가진 속도에 대한 집착은 소련군의 작전술적 지휘관들과 연합군의 작전술적 지휘관들 중 대부분을 구분하는 차이였다. 예를 들어 영국 제2군 사령부와 캐나다 제1군 사령부는 블루코트 작전과 토탈라이즈 작전 및 이후의 행동에서 기갑부대를 투입하길 망설여했다. 미 제3군을 제외하고는 연합군 기갑부대가 보병부대들을 앞서서 진격한 적이 없었다. 연합군 작전 지휘관들이 가진 (264쪽) 위험인식의 수준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적은 상황에서도 진격속도가 제한되었다. 반면 소련군은 적의 대응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서 적지 종심으로 중단없는 전과확대를 개시했다. 소련군은 중단이 적의 반격이 가진 효과를 늘려줄 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소련군은 속도와 기동부대 및 보병부대간의 틈을 메우는 방법이 성공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4년의 8개 전선군이 실시한 전형적인 작전에서 12개 전차군 작전의 일일 진격속도는 하루 당 19 km에서 44 km였다. (평균 25 km) 본대와 기동부대간의 거리는 20에서 65 km였다. 소련군은 전과확대 부대와 후속부대간의 거리 표준을 45 km로 잡았고 이 틈 사이에 후속부대들에 소속된 선견대들을 투입했다.1


1944년 여름에 붉은 군대는 3개의 전략적 공세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들은 5주에서 9주가 소요도었고 벨로루시 작전에서는 600 km,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에서는 350 km, 야시-키시네프 작전(플로에이슈티와 부쿠레슈티에서 헝가리 국경까지의 진격도 포함)에서는 1,000 km 이상을 진격했다. 동 시기에 연합군의 공세는 9주간 실시되었고 적지 종심 550에서 600 km 정도에 도달했다. 이 작전들의 시공간적 범위 내에서 거칠게 비교하자면, 그 결과는 서로 달랐다. 본서의 이전 장들에서 살펴보았듯이 소련군의 공세는 독일군의 주요 집단을 섬멸했고, 독일군에 맥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우속 공세를 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도하며 종결되었다. 서부전선의 독일군도 큰 패배를 당하고 막대하 손실을 입었지만, 상당한 양의 부대들과 사령부들이 생존하여 재편성을 하였다. (이 전력은 아르덴 공세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연합군은 라인 강과 서부방벽의 대부분에서 후속 공세를 위한 중요한 교두보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노르망디 전역이 시작되었을 때 가졌던 막대한 가능성에도, 그 결과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결정적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다. 작전술적 수준의 교리의 부재와 연합작전의 한계였다.


연합군의 고위급 지휘관들은 막강한 병력을 지휘했다. 하지만 그들은 적의 섬멸을 목표로 이 전력을 어떻게 운용할지 명확하고 지속적인 개념이 없었다. 연합군은 훌륭하고 복잡하지만 어떻게 작동시켜서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낼 지에 대한 설명서가 없는 기계였다. 영국군과 미군의 교리는 대규모 작전의 수행에서 매우 혼탁했다. 당시 미군에 존재하는 사상과 이전의 경험 때문에, 그들은 전통적인 방법을 효과적으로 구사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막강한 기동전력으로 전술적 성공을 (265쪽) 작전술적 성공으로 확대시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지에 대한 성숙한 교리가 없었다. 연합군으로서는 놀랍게도, 앵글로색슨인의 상식과 주도권이 통일성 있고, 심사숙고한 계획수행과 제대로 성립된 이론으로 전환되지 않은 상황이 그들의 장군들에게 보편적이었다. 소련군의 전간기 교리가 영국군 및 미군보다 공세를 통한 작전술적 성공을 거두는 데 훨씬 더 잘 설계되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소련군이 현대 무기와 장비 및 장차전의 특성이 가진 가능성을 훨씬 더 통찰력 있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방 군대들이 채택할 수 있던 이러한 교리는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어느 군사적 천재도 전과확대 제파가 적시에 투입되어 성공을 거두기 위해 제1 제파가 돌파를 하며 사상자를 감수해야 한다는 문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붉은 군대(또는 독일 국방군)가 보여준 교리의 엄격한 실행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최고사령관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작전술적-전략적 상황을 이해하고, 목표평가에 기반을 두어 목표를 달성할 확실한 작전술적 전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최고사령관은 자신의 전망을 주요 예하 지휘관들에게 전해 주고, 각 지휘관에게 부여한 목표를 이해시키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단합의 지속을 보장해야 한다. 아이젠하워는 이 과업에 실패했다. 아이젠하워는 작전을 분명히 수행하지 않았고 작전 하나를 지속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집단군 사령관들에게 작전수행 임무를 제대로 부과하지도 않았다. 노르망디 전역 이후에 이러한 상황은 여러 타협과 임기응변의 결과로 확대되었다. 반면 붉은 군대의 1944년 하계 전역은 명백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아이젠하워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아이젠하워에게는 스타브카와 스타브카 대리들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들 같은 방법이 없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전역 구상을 하며 직접 사용할 수 있는 막대한 자원들이 있었다. 1944년 6월 1일에 스타브카 예비대에는 인력 650,000명, 화포 9,500문, 전차와 자주포 2,000대, 그리고 항공기 3,000대가 있었다. SHAEF에는 그러한 예비대가 없었다. 스타브카는 엄격히 중앙집중된 지휘통제 체계의 정점에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동맹국에 대한 고려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스타브카는 전선군들을 응집력 있고, 논리적인 교리로 지도하며 전략적 계획을 세우고 계획의 각 단계마다 결과를 만들며 서로 밀접히 조율된 전선군 작전들을 시행했다. 스타브카는 막강한 지휘 권한과 정치적 수단 및 다른 수단으로 병력의 단합을 확보했다. 아이젠하워가 지휘한 민주주의 군대들은 각각 다른 전통과 지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군과 캐나다군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자율성을 방어하는 데 열심이었으며 (266쪽) 그들 정부의 지지도 받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내리는 훈령보다 그들을 더 구워삶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주요 지휘관들(그리고 프랑스군의 지휘관들도)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상황은 미군의 집단군 사령관인 브래들리와 그의 참모 리에게서도 나왔다. 아이젠하워는 각 국가의 자존심과 위신, 군사정책 및 국가정책, 그리고 유럽 작전전구에서의 원할하고 방해받지 않아야 노력 때문에  강한 성격을 가진 예하 지휘관들을 복종시킬 수 없었다. 아이젠하워 자신의 품성에도 타협을 이끌어내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조화를 이끌어 낼 추진력이 없었다.2


SHAEF가 논의하거나 결정한 작전결심에는 정치적 반발이 있었다. 고위급 지휘관들 중에 작전을 겸열하거나 단지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 중 가만히 있지 않던 사람들이 드물었다. 본국의 군 당국에서 나온 불만은 국내적 정치문제나 국제적 정치문제로 쉽게 비화되었다. 이는 언론들이 쉽지 않게 채결된 타협도 무너트려 버릴 만큼의 불화를 일으킬 위험을 무시하고  열정적으로 기사를 쓴 데에만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전기획과 작전수행은 최하 수준의 공통분모가 되었고, 행동의 과정은 최소한의 불만족만 일으켰다. SHAEF의 참모장인 베델 스미스(Bedell Smith)는 이렇게 짜증을 내었다. "우리는 과감한 일은 절대 못한다. 우리가 타협하고 또 타협해야 하는 사람이 최소 17명이 있어서 과감해질 수 없다. (중략) 언제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될까?"3원정군의 민주주의 국가 군대들로 구성된 다국적군 성격은 붉은 군대가 1944-45년에 수행한 과감하고 결정적인 작전들의 수행을 막았다. 실제 연합군은 각 군대들이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본서 1권 제1장에 기술한 "전쟁의 원칙"을 지속적으로 적용하는 데 스스로 제약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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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 M. Anan'yev, Tankovyye Armii v Nastupleniypo Opytu Otechestvennoy Voyny [Tank armies in the offensive from the experience of the Patriotic War](Moscow: Voyenizdat, 1988), 412-413.
  2.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의 긴장은 1945년 1월에 터져나왔다. 아이젠하워는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가 시작되자 미 제1군과 미 제9군의 지휘권을 몽고메리에게 일시적으로 넘겼다. 브래들리는 위기가 지나간 후에도 아이젠하워가 제9군을 계속 제21 집단군에 배속시키겠다고 말해 주자 이를 굴욕이라고 생각했다. 브래들리는 이에 사임하겠다고 아이젠하워를 위협했다. 브래들리는 SHAEF가 전구 사령부 수준의 예비대로 제12 집단군의 사단 몇 개를 사용하겠다고 하자 똑같이 반응했다. 브래들리는 자신의 불충의 대가로 4성 장군으로 진급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자 진정했다. Carlo D'Este, Eisenhower: Allied Supreme Commander (London: Weidenfeld and Nicolson, 2003), 667-668, 671.
  3. D. K. R. Crosswell, The Chief of Staff: The Military Career of General Walter Bedell Smith (Westport, CT: Greenwood Press, 1991), 306.

C. J. 딕, <연합군과 소련군의 작전술 비교>-3 인용할 자료들

전과확대


오버로드 작전의 개념은 영국군이 적의 주력을 고착시키고 무너트릴 동안 미국이 셰르부르의 중요한 항구를 장악하고 교두보에서 돌파해 나오는 것이었다. 연합군은 이와 함께 D+90일까지 브르타뉴 항구를 점령하고 루아르와 센 강 동안을 정복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동안 지중해를 통해 남프랑스에 상륙하여 적군을 분단시키고 또 다른 주요 항구를 확보할 예정이었다. 노르망디 전역 이후의 계획과는 달리, 실제 전역은 센 강으로의 진격은 D+120일에 시작되었고 알베르 운하에서 독불 국경에 도달한 시간은 D+240일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독일군은 전열을 유지하고 전투를 치르며 순차적으로 서부방벽까지 후퇴했다. 이는 연합군의 우세한 화력과 기동성 및 공중우세에 비해 매우 수수한 시나리오였다.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SHEAF)는 독일군의 주요 집단을 작전술적 기동으로 섬멸하거나 (256쪽) 적이 효과적인 방어를 유지하지 못하게 핵심적인 지역을 점령하러 종심 돌파를 할 어떠한 우발계획도 세워놓지 않았다. 심지어 적을 어떻게 섬멸할지 광범위한 고려도 없었다. 이게 합동참모본부의 주요 임무인데도 말이다.


이것이 서방 연합군과 붉은 군대의 이론과 실제를 구분하는 중요한 영역이었다. 영국군과 미군은 종심작전 개념이 아무것도 없었다. 노르망디에서는 전술적 전과확대보다 더 큰 상황을 내다본 작전이 없었다. 연합군의 두 집단군은 단일 제파로 전개되었다. 야전군들도 거의 단일 제파로 배치되었고, 소규모 예비대만 남겨두었으며, 공격을 하지 않는 구역에는 적의 능력과 불균형할 정도로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배치해 두었다.  강습 군단들은 대부분 예비대였고, 자주 1개 기동사단이나 2개 기동사단(토탈라이즈 작전과 코브라 작전에서는 3개였다.)이었지만, 단지 전술적 전과학대를 위한 병력이었다. 전술적 전과확대 부대마저도 블루코트 작전과 토탈라이즈 작전 때처럼 지나치게 신중하게 운용되었다. 적의 작전술적 후방으로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야전군의 양익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3개 기갑사단 정도의 야전군급 기동집단도 없었다. 연합군이 겪은 실패는 연합군 장성들이 자주 전술적 수준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고 결정적인 작전술적 효과가 있을 작업을 하지 못하는 빈번한 무능에서 징후가 보였다. 중요하고 주목할 만할 예외는 조지 S. 패튼이었다.


패튼은 동료 야전군 사령관들과 집단군 사령관들보다 공중우세 상황에서의 기동이론의 토대를 더 확실히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패튼은 속도를 무기로 사용해 기동력이 떨어지는 적에게 행동을 강요하고 효과적이지 않은 방어를 갖추게 만들어서 안정된 방어를 다시 만들거나 반격을 하지 못하게 종심 깊게 진격하여 적을 거의 마비 상태로 만들었다. 패튼은 계속해서 다른 지휘관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목표를 잡았고 목표를 달성할 동안 측방방호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사단의 진격종대를 구성하며 휘하 군단들이 균형과 유연성을 잃지 않도록 하였다1 패튼은 독일군의 성공적인 기갑 지휘관들이 전투의 진화에서 "손가락 끝의 감각"(Fingerspitzengefuhl)이라 부른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손가락 끝의 감각은 성공적인 작전술적 기동을 지도하는 데 핵심적이었다. 패튼은 전선을 자주 방문했고 최소한 자신의 고위 참모들이라도 매일 전선을 방문하도록 했다. 패튼은 야전군의 명령서가 1쪽을 넘어가지 않고 반 쪽 정도 타자기로 쓰면 된다고 보았으며 자신의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의도에 따라 주도권을 잡으라고 하였다. 패튼은 자신의 많은 군단장 및 사단장들은 패튼이 가져온 개념과 지휘방식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다. 패튼의 집단군 사령관인 브래들리는 필요한 참모업무를 수행하면서 패튼의 접근이 매우 위험하고 무모하다고 보았다. 패튼에게는 실망스럽게도, 브래들리는 자주 제3군의 작전속도를 낮추거나 제한했고 패튼이 자신의 임무완수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전력과 보급의 수준을 낮추었다. (257쪽) 패튼의 방법에 대한 몰이해와 불신은 미 육군의 교리가 기동전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로 나타났다. 하지만 패튼의 노력은 자체적인 문제가 있었던 독일군을 노르망디에서 패퇴시켰다.


결국 독일군은 코브라 돌파 이후 아브랑슈로 반격을 개시하며 연합군이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집단을 섬멸할 터무니없을 정도의 오류를 범하며 놀라운 기회를 주었다.  독일군의 기도는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고, 연합군은 완전한 우위를 가졌다. 팔레즈에 형성된 즉흥적인 포위망은 작전술적으로는 완벽해 보였지만 그 수행에는 결함이 깊숙히 내재되어 있었다. 몽고메리는 캐나다 제1군이 캉을 통해 남쪽에서 돌파하여 포위망의 남익을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 과업은 1개 군단의 5개 사단만 참여했고, 공격 직후 실패했다. 그 동안 몽고메리의 집단군 소속인 다른 10개 사단은 중요하지 않은 축선에서 공격이나 방어를 취하고 있었다. 브래들리는 결단력이 부족했고 패튼이 촉구한 데로 포위망을 닫아버리기 위해 제3군의 포위망 남익을 아르장탕에서 팔레즈로 보내서 몽고메리의 근시안적인 행적을 보충해 주려고 한 것 같다.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집단군 사령관들을 통제할 권한으로 모두가 동의하던 포위망의 문을 닫는 데 실패했다. 독일 제5 기갑군과 제7군을 센 강 인근에서 종심깊게 기동하여 섬멸할 또다른 기회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도 사라졌다. 몽고메리는 강력한 기동전력을 좌익으로 옮겨서 강을 서안에서 도하할 수 있었고, 브래들리도 강 양안을 통해 망트(Mante)에 있는 제3군의 교두보에서 주력을 전과확대 시킬 수 있었다. 공수군단은 전술항공력의 지원을 받으며 독일군의 도하점을 공략해 적의 후퇴를 차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작전술적 근시안, 우유부단함, 의지의 부재가 또 합쳐져서 나타났고, 제일 우세한 상황에서도 기회를 잡지 못했다.


독일 B 집단군은 노르망디에서 내장이 다 빠져나가 버린 상태였다. 붉은 군대가 동부전선에서 하계공세로 독일군 집단군 3개를 섬멸하고 다른 집단군도 포위한 상태에서 동부전선으로부터의 증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몇 안 되는 독일군 사단만이 부차적인 전구로부터 서부로 배치될 수 있었는데 이 병력으로는 무너진 전략적 전선을 복구할 수 없었다. 연합군은 미래에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고 울트라 암호해독기 덕분에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가장 잘 볼 수 있었다. 연합군은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었고 독일군은 선택권한이 없었다. 연합군의 우세를 제한하는 유일한 요소는 군수보급이었다. 8월이 시작될 때 무엇이 필요한지는 분명했다. 최고위급 수준에서 나오는 분명하지 않은 지시들은 군수보급의 현황을 신경쓰고 있었고 군수보급의 개선을 원순위로 설정했다. 이러한 지시에는 구체적인 목적, 즉 적의 잔존 병력의 섬멸이 필요했다. 그리고 만약 적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258쪽) 공세를 지속하고 독일군의 전쟁노력에 결정적인 장소, 특히 루르로 접근할 라인 강의 교두보를 만들고 지속적인 작전을 보장할 항구의 점령이 필요했다. 이 목적에는 목표달성을 위한 주공축선과 조공축선의 설정이 뒤따를 것이었으며, 그러한 축선 선정은 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할당될 전력의 수준과 보급 우선순위는 작전종심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만큼 지정된 공세축선에서 보장되어야 했다. 만약 모든 목표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작전은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전구 사령부나 집단군 사령부들은 승자의 질병에 걸려 버렸다. 연합군 지휘관들은 오만에 빠져서 적이 노르망디에서 입은 손실을 복구할 수 없다고 믿었고, 작전술이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무시했다. 몽고메리와 브래들리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작전개념들을 만들었고 자신의 집단군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군의 경우 이는 전략적 결심수립에 기여할 가능성이 없었다. 최고사령부는 모호하게만 답변했다. 그 결과는 모든 상급 부대들이 동시에 모든 축선에서 진격하는 것이었다. 군수보급의 제약은 계속해서 군수장교들이 기적을 만들고 도로 상태를 정리하거나 적이 아군의 보급품이 다 떨어지기 전에 무너지기만을 바라는 상황을 만들었고 그에 따라 공세의 한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위험에서 탈출하고 패배한 부대들 새로운 부대와 합치고, 스칸디나비아와 이탈리아에서 부대들을 재배치하여, 어느 곳에건 지정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부한 보급품이 없던 연합군의 돌파를 멈출 수 있었다.


작전술의 필요는 집단군 수준에서도 무시당했다. 서로다른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데 너무 적은 부대와 보급품이 할당되자, 몽고메리는 독일 제15군을 바다로 몰아붙여 섬멸하고 셸트(Scheldt)로 가는 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몽고메리는 아른헴을 통해 라인 강으로 돌파하려 했다. 몽고메리의 의심스러운 계획과 엉망으로 수행된 작전은 실패했다. 제21 집단군은 지리적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한계에 봉착했고 연합군의 작전을 장기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안트베르펜으로 가는 길을 적시에 열지 못했다. 몽고메리는 정보장교들이 이 계획에 공수부대를 포함시키는 데 심각한 우려를 표했음에도 주력을 도박에 투입했다. 게다가 몽고메리의 지상전력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몽고메리의 군수보급품 계산은 매우 낙관적인 사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브래들리도 비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했다. 브래들리는 다양한 축선으로 진격하며 조공축선으로 삼거나 공세를 하지 않는 축선으로 삼을 수 있던 남쪽 축선을 강조하면서 명확한 설명 없이 브레스트를 공략하기를 고집하며 비싼 대가를 치렀다. 브래들리는 그 결과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자신의 두 야전군 사령관들이 자신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며 보급의 위기를 가져왔다. 보급품이 바닥날 위기에 처하자, 브래들리는 패튼의 로렌 진격을 막았다. 하지만  호지스가 북쪽으로 진격하는 전망, 특히 휘르트겐 숲을 점령하는 무의미한 시도에 보급품을 쓸데없이 쓰는 것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9월 말에, 다양한 축선에서 수행하는 공격은 갈수록 약해졌고 군수보급의 위기가 계속 커지며 추동력을 상실했다. 조잡하게 편성된 독일군의 상처입은 부대들도 연합군의 두 집단군을 정지시킬 수 있었다. 어느 축선에서건 계획된 작전종심만큼 공세를 유지할 수준의 전투력 및 군수보급품의 충분한 집중이 없었다. 연합군은 결정적인 승리가 아닌 새로운 반쯤의 교착상태만 달성했다. 연합군은 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칙 대부분을 무시했다. 연합군은 선택한 목표를 계속 유지하지 않았다. 연합군은 병력집중과 그에 따른 결과인 병력절약을 달성하지 않았다. 유연성은 적의 예상못한 강한 저항을 마주하면 사라졌다. 그리고 지속력의 피할 수 없는 한계가 계획에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


주요 실패는 주요 지휘관에게 책임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9월 1일부터 연합원정군 최고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모든 지상군의 총사령관(9월 중순부터 론 계곡을 통해 진격하는 병력 포함)이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에게는 작전지도의 책임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상부와 부하들 사이를 중재하고 의견일치를 보려고 노력하르나 막점목표를 논쟁과 해석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이젠하워의 우선순위는 병확하지 않았고, 변덕스럽기까지 하였으며, 루르로 주공을 가하련느 노력은 브래들리를(또는 브래들리의 군수참모장인 리를) 통제하는 데 실패하며 희석되었다. 게다가 아이젠하워는 제6 집단군을 비롯한 집단군들 사이의 공조에서 어떠한 의미있는 역할을 맡지 못했다. 아이젠하워는 군수보급의 실상에 마주치길 망설였고 그래서 선택의 바람직함을 무시했다. 특히 아이젠하워는 공격하지 않는 구역에서 보급품을 절약하고 주공축선에 더 강력한 집단을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 다시 말하면, 아이젠하워의 병력집중 실패는 기회에 따라 투입하거나 위험한 상황에 대처할 있는 예비대를 만들지 못한 것과 합쳐져서 유연성을 없애 버렸다. SHAEF는 예컨데 코트를 만들 때 옷감을 코트에 맞게 자르는 일을, 계속되는 작전에서 조공 축선에는 단지 병력과 자원이 주요 임무를 달성한 다음에만 배치시켜야 하는 과업을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작전술적 수준의 지휘는 최대한 의사결정을 해야 했지만, 아이젠하워는 그러기를 망설인 것처럼 보인다.


모든 축선이나 대부분의 축선에서 동시에 공세행동을 개시하는 방법은 작전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러한 사고는 제1차 ㅔ계대전의 전략개념에 대부분 기초를 두고 있으며, 대부분의 교전국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도 가져온 개념이었다. 이는 미군 교리의 개념만은 아니었다. 진보적인 야전요무령-36을 만든 소련군 이론가들이 숙청당한 뒤, (260쪽) 스탈린이 전쟁 제1기에 보여주고 재앙을 가져온 사고도 그것에 있었다. 넓은 전선의 공세는 그 지지자들이 주장했듯이 모든 곳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 다양한 축선에서 조율된 돌파에서 적은 모든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을 수 없었고, 돌파당한 전선에서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적이 전선 전체에서 공격을 당하지 않는다면, 적은 지정된 구역에서 방어 병력을 집중시키고 방어 구역을 강화할 수 있어서 전선이 점진적으로 강화되었다. 적은 심지어 반격을 가할 집단도 구성할 수 있었다. (실제 1944년 12월에 아르덴에서 그랬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는 연합군이 전반적으로 공군력과 기갑 및 차량화 부대의 우세를 갖춘 1944년 늦여름의 서부전선에서는 허울만 좋았다. 어떠한 집단도 공격하지 않는 구역에서 공격을 받지 않았음에도 자신들의 측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포위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개념은 다시 말하면, 연합군의 우세한 기동성과 완전한 공중우세(공중우세는 독일군이 기상상황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아르덴 공세를 파멸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다)가 가진 작전술적 효과를 너무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개념은 시공간상에서 주도권을 잡는 가치를 평가절하한 것이었다. 연합군이 지정된 곳에서 기습과 집중을 하고 적시에 예비대를 투입하여 주공축선에서 한번 추진력을 얻으면, 적의 대응은 불가피하게 늦고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발견하고 또 발견했듯이, 돌파구를 막으려고 다른 축선에서 재배치된 병력은 너무 늦게 도착했고 돌파당하기 전에 방어를 안정시킬 수 없었다. 대신에 독일군은 자신들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큰 구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독일군은 조우전에서 패하고 패하거나 우회당해 철퇴 이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물론 독일군은 수준이 좋고 완전편제된 사단을 최소 10여개 정도라도 재배치하면 전략적 전선을 복구할 수 있었지만, 그해 여름의 상황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여기에는 주요 작전술적 집단도 없었다. 독일군은 아르덴 공세 때 작전술적 집단 하나를 만들었지만, 이는 연합군의 하계-추계 전역이 필요하지도 않았던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던 것이었다. 이는 연합군이 가진 잘못된 작전술적 사고 때문이었다. 작전술적 정지는 독일 국방군이 숨쉴 틈을 주어 무너진 부대들을 다시 만들고 새로운 부대들을 창설할 시간을 허용했다. 독일군이 8월 초에 아브랑슈에서 돌파를 할 반격 집단을 집중시키려 할 때는 연합군의 공세가 계속 추동력을 유지한 상태였고, 상황은 6일 만에 반전되어 독일군의 공격은 개시되자마자 파멸했다.


넓은 전선 개념은 (261쪽) 전투에 대한 선형, 소모 접근의 산물이었다. 넓은 전선 개념에는 선정된 축선에서 시행하는 종심돌파와 속도의 파괴적인 효과를 거의 인식하고 있지 않았으며, 측방노출을 지나치게 우려했고, 결정적 목표를 가진 합목적적인 작전술적 기동을 수행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대조국 전쟁 제2기의 동계-춘계 공세를 제외하고는 쿠르스크 전투 직후의 반격부터 이러한 교훈을 알았다. 소련군은 1944년에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북부, 그리고 루마니아에서 독일군을 무너트리며 승리의 공식을 만들었다. 이러한 작전들에서는 적의 주요 집단을 섬멸한 이후에 전반적인 진격을 수행했다.  
 


  1. 조지 S. 패튼의 회고록 War as I Knew It (Boston: Houghton Mifflin, 1975)에서 그의 사고를 볼 수 있는 단락 두 개를 발췌해 보았다. 패튼은 이렇게 썼다. "전쟁은 매우 단순한 것이고, 결단력 있는 성격은 자신감, 속도, 그리고 대담함이다."(354) 그리고 패튼은 왜 생나지레(St.Nazaire)에서 트루아(Troyes)까지 500 km를 진격할 준비를 하며 제3군의 우익을 개방시켜 놓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결정은 독일군이 병력은 충분하지만, 고속으로 공격할 만큼의 충분한 기동성이 없으며, 제16 전술항공사령부가 아군에 충분한 지원을 해 주고 있어서 적의 어떠한 행동도 아군의 손상을 주지 못할 것이며, 아군의 더 우세한 기동성이 허용하는 한 적을 무너트릴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내렸다." (384) 패튼은 제3군 전체를 진격시키며 9월에 모젤(Moselle) 강에서 한계에 달할 때까지 작전술적 전과확대를 하는 막대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패튼은 상황 변화에 느리게 적응했고, 이 때문에 서부방벽을 밀어붙이고 라인 강에 도달한다는 그의 전망이 치명적이었음을 보여주었다. 

C. J. 딕, <연합군과 소련군의 작전술 비교>-2 인용할 자료들

돌파

  

제1의 작전술적 문제는 어떻게 적의 강력한 전술방어지대를 돌파하느냐는 문제였다. 실제 돌파는 그게 가능해질 때까지 유일한 작전술적 문제였고, 제차 세계대전 때처럼 적을 소모만으로 상대한다는 가정은 선택할 수 없었다. 붉은 군대는 1929년에 V. K. 트리안다필로프가 저서에서 충격군의 과학적인 계산에 따른 집중을 통한 이론을 일찍히 확립하며 개념상의 답을 내놓았다. 그 이론은 여러 번 후퇴를 겪었고 실제 수행에서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지만, 이 이론의 발전은 승리의 공식이었다. 1944년 여름에 승리의 공식이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식은 성과를 거두었고, 공식이 진화하려면 독일군 종심, 병력밀집도, 그리고 방어 방법에 따른 대처가 필요했다. 또한 작전 별로 특별한 상황에 따라 공식이 수정되었다. 투입된 전력, 시기나 공격축선, 그리고 가끔 공세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자명하게 되었다. 야전요무령에 따르면 대규모 기만, 계획의 자세한 작성이 모든 작전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1 그러한 요소가 없으면, 방어측이 방어구역을 구축하여 급속한 돌파를 하기에는 너무 막강해진다. 그리고 공세 성공의 핵심은 속도였다. 만약 속도를 처음부터 얻지 못한다면, 독일군의 방어가 불안정해지지 않고 아군의 대응이 늦도록 강요하여, 전투가 1943년의 오룔 작전처럼 소모전투의 형태가 되버린다. 그렇게 되면 사상자 수치가 높아지고 결과도 보장이 안된다. 제1 제파가 손실을 감수하고 돌파를 확정하면 전과확대 제파가 고속으로 이동해 적은 손실만 보고 결정적인 작전술적 기동으로 적의 섬멸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방법은 붉은 군대가 1944년의 모든 작전에서 성공을 거둔 조건이었다. 성공의 조건은 전선군 기동집단이 작전 1일차, 간혹 2일차에 투입되면서 적의 종심 깊게 고속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2

  

영국군은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들을 연구했고 돌파에 필요한 기준과 기술을 창으려 했으며 엘 알라메인 전투부터 튀니지를 거쳐 노르망디에 이르는 전훈을 통해 돌파 방법을 개선시켰다. 많은 부분에서 영국군이 내놓은 답도 소련군과 매우 유사했다. 블루코트 작전과 토탈라이즈 작전은 1944년 여름 공세의 기술로 생각할 수 있었다. 두 작전은 모두 기습이 중요한 요소였고, 기만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블루코트 작전은 적이 예상하지 못한 축선으로 병력을 급격히 전환시키고 집결을 은폐했으며, 토탈라이즈 작전에서는 장갑차를 활용해 야간에 기습 공격을 하여 기습을 달성했다. (252쪽)

 



표 4.3 소련군과 영국-캐나다군 작전의 통계 비교


1. 소련군은 통계에서 돌파 구역에 km 당 배치된 소총병 사단의 수를 제시하고 있다. 소총병 사단의 비교는 의미가 없어서 생략했는데, 소련군 소총병 사단의 병력은 영국군 보병사단의 5분에 1에서 3분의 1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2. 중형 전차와 중전차만 포함했고 경전차와 특별 기갑차량은 제외했다. 이 통계는 근접지원전차와 기동집단 및 예비대에 소속된 모든 기갑차량을 포함했다.

   

두 작전에서 영국군은 붉은 군대처럼 지정된 축선에 상당한 우세, 특히 화력에서 상당한 우세를 달성했다. 표 4.3은 소련군의 전선군 작전들과 동시기에 제21 집단군이 노르망디 전역에서 실시한 작전을 비교하고 있다. (굿우드 작전에 관련된 통계는 포함하지 않았다.) 영국군과 소련군이 돌파에 필요로 한 포병의 양이 차이가 없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소련군은 영국군처럼 막대한 중폭격기 및 중형 폭격기의 지원은 받지 못했다. 영국군은 기갑전력이 더 많았다. (작전에 투입된 4개 기갑여단이 보유한 전차의 수가 3개 기갑사단의 전차들보다 더 많았다.) 대게 소련군과 영국군의 방법은 비슷했다. 세밀하게 조율된 공격준비사격과 그 직후 전개되는 이동화망, 모든 수준에서 2개 제파로 분리된 공격(프랑스에서는 대대급까지 그렇게 되었다), 막대한 보병지원전차로 증원된 보병의 전술방어지대 돌파, 그리고 전술적 전과확대를 위해 전선에 근접하게 배치된 기갑부대들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제21 집단군이 노르망디 상륙 이후부터 수행한 모든 공세작전은 1개 야전군이 실시하는 작전이었지 집단군 크기의 작전이 아니었으며, 작전에는 1개 군단이나 2개 군단만 투입되었다. 그 결과 공세정면은 매우 좁았으며, 그 때문에 적시에 전과확대를 할 수 없었다. (진격로가 부족했고 측방 공격이 불가능했다.) (254쪽) 그리고 적의 붕괴는 국지적이고 제한적이었다. 공격은 연속적인 단계를 사전에 결정한 바에 따라 개시되었고, 지휘관들은 아군손실에 겁을 먹고 항상 전술적으로 위기를 피하려 들었다. 각 공격 부대들은 공세 단계가 끝나면 정지했고, 다음 제파가 도착할 때까지 적의 반격을 막기 위해 확고한 진지를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기갑부대(즉 전과확대 제파)는 야간에 계속 공격을 망설였다. 그래서 전술적 정지가 각 작전마다 있었다. 독일군은 이 덕분에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고(1944년 이전의 작전들처럼) 급속히 병력을 재배치하며 방어를 복구함에 따라 영국군이 공세의 추진력을 잃어버렸다. 반면 소련군의 교리는 속도를 매우 강조했다. 소련군은 전과확대를 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강조했고, 이 때는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지 말라고 했다. 계속해서 공격을 할 수 있지만 측방 부대를 기다리거나 후속 제파를 기다리기 위해 정지한 지휘관은 직무유기를 범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붉은 군대에 해가 되기도 하였다.)

  

7월 말에 미군은 좁은 정면에 막대한 전력을 집중하는 일을 피하려 했지만, 교두보에 상당한 인력, 무기, 그리고 탄약을 오랫동안 갖추자 영국군의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넓은 정면에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는 방법을 선호했다. 이러한 방법은 적의 방어를 약화시켰지만, 방어에 균열을 내진 모했다. 이러한 방법의 절정은 미 제1군이 1생로를 점령하려고 17일 동안 평균 10 km를 진격하며 40,000명의 사상자를 낸 일이었다. 선형소모전투의 방법은 비효율적이며 독일군의 저항능력을 무너트리기에는 너무 값비싼 방법임이 입증되었다. 미군은 자체 전훈(그리고 영국군의 조언)에서 배우며 집중의 원칙을 따르기 시작했다. 코브라 작전은 이전의 행동들에 비해 급격한 발전이었다. 제1 군은 돌파 정면 6.5 km에 제7 군단의 3개 보병사단을 집중시켜 돌파를 하도록 하였고, 2개 기갑사단과 1개 차량화보병사단을 전과확대에 투입했다. 그래서 제1군의 보병 40 %와 기갑사단의 반이 제1군 점령지역의 10% 되는 지역에 집중되었다. 이리하여 km 당 화포 210문(대전차자주포와 중대공포도 간접사격에 투입되었다)과 전차 및 대전차자주포(경전차 포함)가 배치되었다. 7월 25일의 공격은 두 가지 방법에서 기습을 거두었다. 중폭격기 1,8000 대라는 전례가 없는 사전 항공폭격을 비롯한 공격의 중량과, 제4 전술고아령부의 엄호를 받는 기갑종대의 집중이라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코브라 작전의 1일차는 느리게 시작되었지만, 2일차에는 돌파를 달성했다. 영국군처럼 미군도 돌파 정면이 좁아서 혼잡의 문제가 일어났고, 그 결과 (255쪽) 전과확대제파의 투입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군단 사령부는 하위부대들을 단순하게 돌진시켜, 작전 3일차에 18-20 km 진격을 달성했다. 작전은 센 강 근처까지 5일 만에 30 km를 진격하며 성공했지만, 독일군 좌익 전체를 섬멸하진 못했어도 적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코브라 작전은 많은 부분에서 소련식 작전이었다. 코브라 작전의 성공은 작전술적 수준의 시너지인 다른 축선에서의 공격으로 독일군을 고착시켜 기동부대(제2 친위기갑군단)을 잘못된 곳으로 배치시키게 만든 것에 달려 있었다. 이리하여 기습을 달성했다. 미군은 독일군의 방어를 좁은 정면에 막대한 전투력을 집중시키며 돌파를 달성했다. (하지만 당시 적이 군수보급을 비롯하여 상당한 문제에 처한 상태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돌파는 종심전투를 수행하는 강력한 전과학대 제파의 투입으로 확대되었다. 전과확대 제파의 목표는 적 집단의 포위와 섬멸이었고 이로서 적의 방어전선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코브라 작전의 성공보다 더 놀라운 것은, 미군이 일주일 후에 추격 중에 적의 저항을 마주치자, 이전에 사용했던 선형의 파편적인 전투로 회귀했다는 것이었다. 미 제1군은 아헨과 휘르트겐 숲에서 그리했고 제3군은 로렌에서 휘하 군단들이 독립된 축선에서 계속 진격하다가 계획에 따른 시공간상에서 합류하지 못했다. 미군이 원한 집중은 주력의 잘못된 축선 선택 때문에 방어측이 약화된 상태에도 공세의 추진력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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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조국 전쟁에 대한 소련 측 저작에서는 상당한 양을 기만에 할애하고 있는데, 기만만 다룬 저작도 많다. M. M. Kir'yan, ed., Vznezapnost' v Nastupatel'nykh Operatsiyakh Velikoy Otechestvennoy Voyny [Surprise in offensive operations of the Great Patriotic War] (Moscow: Nauka, 1986)과 V. A. Matsulenko, Operativnaya Maskirovka Voysk [Operational concealment/deception of forces] (Moscow: Voyenizdat, 1975)를 참고할 것. 소련군은 기만에 막대한 자원을 투자했다. 반면 영국군과 미군은 전략적 기만에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작전술적 수준의 기만에는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았다. 유럽 작전전구에서 기만은 소규모 부대가 수행하는 전술적 수준의 부대만 수행했다. 이에 대해서는 Jonathn Gawen, Ghosts of the ETO: American Tactical Deception Units in the European Theater, 1944-45 (Newbury, UK: Casemate, 2002)에 서술되어 있다.
  2. 하지만 대조국 전쟁 제3기의 작전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붉은 군대는 전술 및 작전술적 이론을 개선하기 위해 끝나지 않는 과정을 계속해서 거쳤다. 실제 1944-45년의 모든 성공한 공세들 전에는 실패하거나 부분적으로만 성공한 공세도 있었다. 이 중에는 1943년 10월부터 1944년 4월까지 벨로루시에서 실시한 공세, 1944년 4-5월 간 루마니아에서 실시한 공세, 1944년 7-8월에 발트 연안에서 실시한 공세와 1944년 10월에 동프로이센과 헝가리 동부에서 실시한 공세가 있었다. 힘든 경험은 대조국 전쟁 제3기의 공세 성공에 기여했다.

C. J. 딕, <연합군과 소련군의 작전술 비교>-1 인용할 자료들

* 본문은 영국의 소련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찰스 J. 딕이 작년 말에 출간한 저서 From Defeat to Victory: The Eastern Front, Summer 1994의 제4장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딕은 1980년대에 소련군 연구를 중점적으로 한 학자로 이 책에서 1944년의 소련군의 하계공세를 분석하고 있으며 이전에 쓴 저작인 From Victory to Stalemate: The Western Front, Summer 1944에서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이후 서부전선에서 보여준 연합군의 작전술적 행동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연구를 통해 도출한 결론으로 소련군과 연합군의 작전술적 군사행동 수행을 비교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소련군과 연합군의 작전술


동부 전구와 서부 전구의 비교



두 전구는 지리적 크기에서 크게 달랐다. 지형의 특성(대부분), 기반시설 개발의 정도와 연합국과 소련군이 상대하는 적군의 크기에 차이가 있었다. 처음 보면 서방 연합군과 소련군의 군사행동 간의 의미 있는 비교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전부 그렇지는 않다. 여기에는 작전술적 수준의 지휘통제와 작전술적 공세 과정에서 외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세 개의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적, 지리, 그리고 기상 상황이었다. 1944년 여름에 서부전구와 벨로루시 및 우크라이나 전구에서 이 세 가지 요소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어서 확실한 비교를 하려면 신중해야 한다. 다른 요소는 지휘관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상당한 영향을 끌어낼 수 있는 효과였다. 이러한 효과에는 연합국간의 상호 고려와, 상부에서 내려오는 명령, 그리고 앞의 두 요소에서 파생된 군수보급 지원의 수준이었다.


소련군과 연합군의 가장 큰 공통점은 적이 독일군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두 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전력이 동일하진 않았다. 한편으로는 수준이 낮은 고정배치 사단들이 서부전선에 세 배쯤 더 배치되어 있었고, 독일군의 보병사단 중 대부분의 부대는 경험이 없으며, 주둔 임무에 더 알맞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 전선에 배치된 독일군 병력은 인력교체가 잘 안되고 분산되어 있었으며, 러시아 전선의 헝가리군은 전투에 그다지 좋지 않았고 루마니아군은 대부분 전투력과 신뢰성을 유지할 지 의심스러웠다. 독일군은 허약해진 (245쪽) 부대들을 중요하지 않은 축선으로 배치하거나 더 나은 병력으로 교체했지만, 여전히 소련군이 전화확대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약한 지점들이 많았다. 이런 점에서 두 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의 질적인 차이는 크게 없었으며, 두 전구의 독일군은 적절한 작전술적 예비대, 특히 기갑예비가 부족했다.


하지만 1944년에는 전구 사이에 최소 7월까지 존재한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그차 차이는 작전범위였다. 독일군은 연합군을 노르망디 교두보에 고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교두보의 연합군이 가진 전투력을 고갈시키진 못했지만, 연합군을 130 km 정면의 전선에 고착시킬 만큼의 충분한 전력이 있었다. 표 4.2가 보여주듯이, 연합군이 결정한 공세구역에서 달성한 병력 대 공간 비율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공세가 달성한 비율보다 두 배가 높았다.1 이러한 상당한 병력밀집은 방어측에 유리한 지형과 합쳐져서 단기간이라도 영미 연합군이 자체 병력을 구축할 동안 독일군의 방어를 상대로 소모전을 수행해야 했다. 병력 구축이 진행될수록, 독일군의 병력증가보다 연합군의 병력증가가 더 커지면서, 전력비가 연합군 쪽으로 더 기울어갔다. 이 때문에 방어의 안정성이 줄어들어 갔다. 코브라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전반적인 병력 밀집도가 방어측에 더 유리했어도 전력비의 균형이 없었다. 많은 독일군 부대들은 미군을 상대할 때 특히 전력이 감소해 있었으며, 심지어 뼈대만 남은 부대들도 있었다. 미군이 공세를 시작한 결정적인 구역에서 독일군은 심각하게 탄약과 연료가 부족하여 독일 제7군이 이틀 이상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기갑부대를 비교해 보는 것도 양군의 능력을 고려할 때 핵심적이다. 7월 말에 연합군에는 10개 기갑사단이 있었다. 여기에 수많은 독립 기갑연대, 기갑여단, 기갑대대가 있어서 전차와 대전차자주포(모든 손실을 다 교체할 수는 없어도) 7,200대가 배치된 상태였다. 소련군은 벨로루시 작전을 개시할 때 4개 전선군에 8개 전차 및 기계화군단이 있었으며, 독립 부대들까지 합치면 전차와 자주포가 4,000대가 투입되었고, 4주 후에 개시된 루블린-브레스트 공세에는 기갑차량이 1,700대가 투입되었다.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에서 소련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10개 전차 및 기계화 군단의 전차와 자주포 2,2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군과 미군 보병 및 포병은 차량화가 되어 있어서 적시에 적지 종심에서 일어나는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 소련군 보병들은 도보로 행군했고 화포의 대부분은 말이 끌고 있었다.




1. 통계는 작전 개시 단계에서의 모든 작전술적 전력비로 조공 축선과 공격축선이 아닌 축선의 전력도 같이 추산했다.
2. 이 비율은 전술항공전력만 포함하고 전략폭격기는 제외했다. 전략폭격기를 제외해도 연합군의 항공력과 그 작전술적 효과의 지배를 줄잡아 말할 수 있다.


두 전선에서 독일군은 어디서든 (246쪽) 방어가 돌파당해서 심각한 열세 상태였다. 작전의 크기 때문에 작전은 기동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연합군과 소련군의 기갑 및 차량화 전력은 도보로 느리게 움직이고 말로 기동하는 독일군 부대들을 쉽게 포위하고 적의 작전술적 종심으로 질주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독일군은 효과적인 지연행동을 하는 능력, 그리고 예비대로 종심 깊은 새로운 방어를 구축하는 능력과 심지어 연합군의 공중우세 아래서도 포위망을 탈출하는 능력은 연합군의 공중우세로 자주 제한되었다. 연합군 항공전력의 개입으로 독일군의 대응이 느려지고 분산되었으며, 근접항공지원이 기갑 선동이 돌입한 곳까지 포병의 지원범위가 닿지 않는 빈틈을 처리해 주었다. 작전술적 수준의 의사결정은 끊임없는 항공정찰과 울트라 암호해독기를 통한 통신감청의 도움을 받았다. 연합군은 작전술적 전과확대를 할 중요한 카드인 제1 공수군을 가지고 있었다. 붉은 군대에는 이와 동등한 공중수송 전력이 없었다.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해 볼 때 소련군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러시아 스팀롤러"의 효과가 연합군에 비해 적었기 때문이었다.


노르망디의 지형은 방어측에 매우 유리했다. 독일 중부 집단군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은 라스푸티차 때문에 소련군이 작전을 중단하고 재편성을 할 때 전력을 보충했고 야전요새를 크게 강화했다. 독일군의 진지방어는 막강했지만, 한번 돌파하면 작전술적 기동이 가능했다. 동부전선의 지형은 서부전선보다 공세행동에 용이하지 않았다. 동부전선에는 강이 많았고, 모든 강은 그 넓이 뿐만 아니라 강 서안이 더 높고, 깊은 계곡이 많으며, 늪지대와 삼림이 많았다. 그리고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서부에는 사계절 내내 사용할 수 있는 도로가 부족했다. (247쪽) 그 때문에 이곳에서는 북프랑스와 플랑드르 평원보다 공세를 하기에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아르덴 고원도 카르파디아 산맥만큼 어려운 지형은 아니었다. 서부전선의 도로망과 철도망은 동부전선보다 더 잘 발달되어 있었고, 그곳에 배치된 병력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큰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진정 문제가 된 것은 적 종심에 배치된 방어지역이나 방어구역이 아니라 적이 그들을 고착시킬 기회였다. 전차가 기동하기 용이한 곳에는 장애물과 대전차 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중요한 도하점에는 적의 진격을 늦추거나 정지시킬 장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도권을 다시 잡고, 적과 아군의 균형을 아군에 유리하게 유지하며, 적이 응집된 방어를 회복하지 못하게 만들고, 충분히 강력한 기동 전력과 공중우세를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운용할 능력, 즉 작전술이 필요했다.



1944년의 교리 준비상태


전간기 동안 소련군은 군사이론을 발전시키며 군사 분야의 혁명 덕분에 작전술이 전쟁의 분리된 단계이자, 전술과 질적으로 다르며, 작전술을 적절히 적용할 때 결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붉은 군대의 야전요무령-36은 제9절에서 "현대 전투의 기술적 수단은 적이 배치된 전체 종심에서 적의 파괴를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급격한 병력배치 전환, 기습적인 포위, 적 후방 공략, 적의 후퇴로 차단의 가능성이 크게 올라갔다. 공격에서 적을 완전히 포위하고 섬멸할 수 있다." 1941년에서 1942년의 붉은 군대는 그러한 이론을 수행할 간부진이 부족했고 이론 또한 불신을 받아서 독일군의 공격에 모든 수준에서 기습을 당했고, 부적절한 지도와 행정을 받고, 상당한 손실을 당해 그러한 이론을 실행할 수 없었다. 붉은 군대의 재건은 진정 기를 꺾을 만할 일이었고, 소련은 영국과 미국처럼 군을 재건하는 동안 바다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반면 소련군은 계속해서 독일군 전투력의 3분의 2에서 4분의 3 및 추축 동맹군들을 상대해 왔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소련군은 독일군의 오류와 경제적 요소 및 정치체제와 국민의 회복력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현대의 상황에 알맞은 발상을 운용할 청사진의 도움을 받았다.


전간기 교리의 근본적으로 건전한 기본발상이 발전되었고, 필요한 곳에서는 패배의 시기에 격은 힘든 전훈을 사용해 수정되었으며 야전요무령-44를 통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247쪽) 이러한 야전요무령의 큰 장점은 어떻게 고위급 부대 수준에서 전쟁을 수행할 지 명확하게 밝혀준 것이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전술가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전술의 필요를 은연중에 인식하기 시작했다. 하위 부대들은 개념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전술적 공식을 사용했다. 이는 장교들의 급격한 인력교체 때문에 정교한 전술 발전이 방해를 받은 것이 부분적인 이유였다. 더 중요한 것은 소련군 군단과 그 하위 부대들이 더 큰 작전술적 기계의 톱니바퀴라는 것이었다. 만약 작전술적 기계가 효과적으로 돌아가서 병력이 효과적으로 이동하고, 집중되고, 제한된 구역에서 엄격한 시간표에 따라 공격을 개시하면, 그 부속요소는 기계와 같은 정밀함을 보여주었다. 물론 압도적인 포병화력 및 항공화력을 지원을 받긴 했지만, 적의 준비된 방어를 돌파하는 대규모 공격은 불가피하게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수많은 병력은 손실을 견뎌낼 수 있었고, 병력과 장비의 손실보다 더 가치가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돌파 이외의 전투상황이면 단순한 전술이 사라졌다. 적지 종심에서의 전투 동안 나타나는 결과는 양측이 전투력을 회복하는 속도에 달려 있었다. 조우전과 교전 동안의 승리는 결심수립의 속도, 결심의 전파와 실행 속도에 달려 있었다. 속도는 연합군이 시행한 계획과는 맞지 않는 요소였다.


붉은 군대는 대조국 전쟁 제3기에 발전되고, 실제적이고, 어떻게 싸울 것인지 잠재적으로 결정적인 개념을 갖추었고, 계속해서 부대가 그 방법을 실행하도록 가르쳤다. 적의 방어를 돌파하고 무너트리는데 필요한 희생이 많고 어려운 전투는 필요했지만, 전투는 전투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투는 더 큰 국면의 일부였다. 소련군 교리에서 강조하는 것은 적 전선에 대한 급속하고 깊은 침투였지, 전술방어지대 돌파 자체(종심전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수백 km를 진격하는 종심으로의 전과확대였다. (종심작전) 승리는 고속의 전술 및 작전술적 기동으로 달성하였고, 그 목표는 항상 적 주요 집단의 절단/포위와 섬멸이었다. 결정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서 작전은 거대한 크기로 진행되어야 했고, 일반적으로 소총병 사단이 12-16개, 1개 전차군과 1개 기병-기계화 집단이 투입되었다. 전략적 성공은 신중하게 조율되고, 동시 및 연속적으로 시행한 일련의 전선군과 야전군 작전의 결과였다.


소련군의 사고에서 근본적인 사항은 적을 단지 밀어내고 땅을 정복하는 것이 아닌, 적의 섬멸이었다. 한번 공세가 한계에 이르면, 적은 후퇴해서 더 나은 곳에 진지를 재구축하고 효과적인 방어를 취하거나 도리어 반격을 개시했다.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와 하리코프에서 그런 상황을 겪었다.) (249쪽) 그래서 소련군이 즉시 달성해야 할 작전술적-전략적 임무목표는 대게 독일군 주요 집단의 섬멸(물론 땅의 획득은 섬멸의 결과였다)이었다. 일찍이 야전요무령-36(그리고 이후의 교범들)에서는 섬멸을 포위로 달성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포위는 적을 섬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보였고, 그리하여 섬멸한 적을 다시 만날 일이 없게 되었다. 대조국 전쟁 제1기에 붉은 군대는 교리에 따라 여러 번 거대한 포위를 시도했다. 소련군은 여러번 포위에 실패한 후 결국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야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교리는 포위 시도로 발전되었으며, 진격축선의 선택, 돌파 구역의 표준과 포위를 하는 양익이 합류할 종심(적이 탈출할 수 없는 시간에 합류), 내부 포위망과 외부 포위망의 형성 필요와 각 포위망에 할당할 적절한 전력, 포위 중에 포위당한 적 집단이 돌파해 나올 때의 대처, 그리고 공군력의 사용이 고려 대상이 되었다.


1944년에 포위는 소련군의 전략적 공세작전의 전형적인 형태가 되었다. 전략적 공세작전의 범위와 크기는 계속 늘어났고, 대게 2개 전선군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련군은 전반적으로 15회의 작전술적 포위로 적 사단 200개를 섬멸했다.2이러한 작전은 사전에 계획되었으며 기회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실시한 것이 아니었다. 적이 탈출하지 못하게 하려고 종심과 속도가 큰 강조대상이 되었으며 적이 전방위 방어를 취하기 전에 포위망에 갇힌 적을 빠르게 섬멸하는 것도 큰 강조를 받았다. 전술적 수준에서 선견대는 전과확대 제파(이후의 기동집단)에 합류했다. 전과확대 제파는 작전술적 기동으로 결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1944년에 포위망의 두 출발지점은 각각 120에서 300 km 거리를 두고 시작되어 적 종심 200-300 km 지점에서 합류했다. 기동집단들은 이 두 쐐기 선봉에서 매일 25-30 km 를 진격했고 가끔 독일군이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 전에 포위망을 닫아버리기 위해 더 빨리 움직이기도 했다.3 그 결과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예를 들어 비텝스크, 보브루이스크, 그리고 민스크 포위망은 독일군 200,000 명을 포위했으며, 브로디에서는 45,000명, 키시네프에서는 200,000 명을 포위했다. 1944년에만 소련군의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은 반은 작전 1-12일차 내에 섬멸되었고, 4분의 1은 한 달이나 한 달 반 동안 포위망에서 버텼으며, 20% 정도만이 탈출할 수 있었다.4


서방 연합군은 소규모 전쟁 경험에 기반을 두어 과감한 개념이 적었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초기 성공에 대응할 때를 제외하고는 기갑, 차량화, 공수부대와 전술항공력을 (250쪽) 미국과 영국의 막강한 산업능력 덕분에 적보다 더 강력하게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의 공식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공식은 잘못 정의되었다. 연합군의 교리 교범인 미군의 FM 100-5 작전과 영국의 야전요무령, 작전-대규모 부대 3권과 같은 교범은 전술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더 큰 그림이 없는 상황은 전략 실행 과정에서 연합군들 간에 심각한 의견충돌이 일어난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합군은 작전술 개념이라 할 만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연합군에는 전술적 성공과 전략적 목표를 연결시킬 고리가 없었다. 실제 작전술 용어는 1980년대까지 미군이나 영국군의 사전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1980년대에 영국의 소련학연구소와 미국의 소련군사연구소의 선구적인 학자들이 전쟁수행의 새로운 방법(미군과 영국군에게)을 전반적으로 다시 만들기 시작하며 작전술이 사전에 등장했다. 그 전까지는 미군과 영국군 다 영국군이 "대전술"이라 부른 용어를 사용했다. 대전술은 조미니가 한 세기 전에 대규모 부대 수준의 전투라고 정의한 용어였다. 여기에는 전장에서의 전술보다 더 큰 의미가 없었다. 연합군의 작전방법은 그래서 개념적 기반이 없었고 전투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무자비하지만 경제적으로 사용해 조기에 전과확대를 하여 결정적인 효과를 가져와야만 성공이 보장되었다.


연합군은 전역수행보다는 전투수행에 더 초점을 맞췄다. 연합군은 새로운 능력으로 새로운 작전개념을 실행하기 보다는 전술행동을 개선하는데 사용했다. 연합군의 전투방식이 그들이 1919년에 채택한 전투방법이라고 말해도 불공정하진 않겠지만, 개선된 기술 덕분에 그 효과가 질적으로 더 좋았다. 연합군의 교리 저작 몇 권에서 기동의 효과를 보증하였고, 실제 그 효과 실제 실행에서 사례로 나왔지만, 그것은 일반화되지 않았다. 연합군의 작전개념은 대게 선형소모전투였다. 전술적 전투들은 작전술적 효과를 달성할 다음 단계와 논리적으로 사전에 연결되지 않은 채 시작되었다. 연합군의 전술적 수준의 전투력 집중은 자주 전투를 피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려 버렸고, 전투와 소모가 미덕이라는 심리를 끌어올렸다. 기동은 적보다 더 우세한 전력을 가져와 전투에서 수적인 우위를 달성하게 하는 이동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졌다. 미군과 영국군은 전투를 잠재적으로 가능한 결정적 기동의 입구라고 보지 않았다. 연합군에서 대부분 정형화된 작전에 참여하며 경력을 쌓은 고위급 장성들이 겪은 1차 세계대전 경험은 적을 무너트리려고 고정된 진지에서 싸운 것이었다. 동부전선의 더 유동적인 상황과는 달랐다. 전간기의 심각한 군비지출 제한은 새로운 전투방법에 관심을 주고 발전시킬 기회를 제약했다. 게다가 작전교리의 발전도 없었으며 개념을 확대시킨 결과도 없었다. 여기에는 공포, 특히 영국군이 품은 (251쪽) 실패와 사상자를 감수할 수 없다는 공포가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연합군이 승기를 잡는 데 워낙 압도적인 전력을 투입했을 때 과감할 필요가 없거나 소극적으로 활동한다 해도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사고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작전술적-전략적 및 전구 수준에서 연합군 간의 의견 불일치, 몰이해, 적대감정, 그리고 편견이 가장 낮은 지휘부 수준까지 존재하던 공통분모였다.


미군의 1944년도 FM 100-5가 유일하게 포위에 대해 중요하게 언급하는 제561항을 주목할 만 하다.
 

"추격의 목표는 적군의 섬멸이다. 추격을 간혹 후퇴하는 적의 뒤를 적의 병참선을 따라 직선으로 진격하여 달성된다. 후퇴하는 적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은 적의 후퇴로를 가로지르는 포위기동으로 달성해야 한다. 후퇴하는 적이나 적의 독립 전력을 상대로 한 양익포위는 상황이 허락하면 한다. 기계화 부대가 이러한 목적에 적합하다."


영국군의 교범에는 이러한 개념도 더 모호하며 적의 가능한 대응 때문에 더 신중하라고 쓰여 있다. 작전술적 수준의 포위가 미군이나 영국군의 사고 중심부에 없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포위를 실행할 개념도 없었다. 1944년에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의 작전 중 작전술적 목표로 포위를 하기 위해 구상한 작전은 없었다. 연합군은 1944-1945년 동안 포위를 단지 4번만 했다. 첫 번째 포위는 팔레즈 포위망 섬멸이었는데, 팔레즈 포위는 계획된 포위도 아니었고 독일군이 제일 강력한 집단을 80 km 길이의 돌출부에 집중시켜서 양측익이 약화되자 이에 대응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포위망은 완벽하지도 않았다. 독일군 전력의 거의 반인 50,000 명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그 직후 연합군은 센 강 인근에 갇힌 독일군이 상당한 수가 탈출하는 데 이를 저지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적 패잔병 20,000 여명을 포위한 몽스 포위도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였다. 제21 집단군에게 해안가에 갇힌 독일 제15군은 모든 전력이 포위망에서 빠져나와 아른헴 공세를 도와줄 수 있었다. 유일하게 사전에 계획된 양익포위는 전쟁 말기에 루르에서 대부분 기동이 불가능해진 독일군을 포위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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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비교는 벨로루시 작전 및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과 프랑스 및 저지대 국가들에서 수행한 작전의 비교다. 야시-키시네프 작전은 생략했는데, 그 작전이 가장 완벽했고,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소련군의 모든 공세 중 가장 성공적인 병력절약을 달성했지만, 상대한 적의 대부분이 루마니아군이었기 때문이었다.
  2. V. A. Matsulenko, Operatsii i Boi na Okruzheniye [Operations and battle in encirclement] (Moscow: Voyenizdat, 1983), 5. 저자는 포위가 "전투행동의 가장 결정적인 형태"라고 강조했고 소련군에서는 포위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중략) 일반적이었다."라고 썼다.(12)
  3. Ibid., p. 19.
  4. M. M. Kir'yan, Fronty Nastupali [The fronts attacked] (Moscow: Nauka, 1987),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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