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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이글루스를 시작하며




1. 본 이글루는 소련군 작전술의 발전사 연구를 중점으로 삼을 것입니다. 

2. 본 이글루 주인장은 이 책의 역자입니다.


현재 전자화 되었으며 다음의 링크에서 판매 중입니다.

3. 조아라와 문피아에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자작소설 『경성활극록』을 연재중입니다. 

4본 이글루는 대조국 전쟁(독소 전쟁)은 데이비드 M. 글랜츠를, 조선사는 오항녕 교수의 역사관을 따르고 있습니다.

5. 본 이글루는 상당히 소련 편향적인 자료가 많이 올라올 것이고 주인장의 내공이 부족하여 다른 이름 있으신 분들의 피드백이 필수적일 것이라 올라오는 글들을 곧이 곧대로 믿으시면 안됩니다. 

6. 본 이글루는 각주, 미주, 참고문헌 목록의 제시를 좋아합니다




7. 본 이글루는 대륙견공과 환국신민 파시스트들을 사절합니다. 








8. 본 이글루는 소련 편향적이지만 위와 같은 선생들도 사절합니다.

9. 이글루스에 상주하는 묻 이름 있으신 분들과의 교류를 바랍니다. 굽신굽신







『경성활극록』연재하면서 얻은 교훈 경성활극록



19금과 염장이 있어야 조회수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겁니다.



만주작전에 대한 국내 연구사 검토 및 관련저작 간단히 8월의 폭풍

소련군의 만주작전은 일본의 항복, 소련의 동북아 세력 확대, 중국의 공산화, 한반도의 분단, 그리고 쿠릴 열도 분쟁이라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여러 중대한 결과를 남겼다. 러시아의 학자의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의 표현을 빌리면, 소련의 만주작전만큼 “아시아 역사에서 이만큼 중요한 일주일”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작전의 전모는 한국의 일반적인 대중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다른 작전 및 전투와 비교하면 매우 생소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 작전 자체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하여 대중이 접할 수 있는 한국어 자료가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익히 국내에 출간된 여러 제2차 세계대전 통사에서 만주작전은 흡사 전쟁 말기의 짤막한 에피소드 정도로만 그려진다. 21세기 이전에 출간된 통사들부터 그리하였다. 미국 타임-라이프(Time-Life) 사의 제2차 세계대전 총서인 『타임라이프 2차 세계대전사』에서 일본의 항복과 태평양전쟁의 종결을 다루는 편은 만주 작전을 단 세 쪽에서만 언급한다. 독일의 보수주의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Andreas Hilgruber)의 저작인 『국제정치와 전쟁전략 :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관련해서 두 쪽에서만 언급한다. 한국에서 21세기 이후에 출간된 저작에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유명한 군사사가 존 키건(John Keegan)은 1989년에 저술한 그의 방대한 제2차 세계대전사 통사인 『2차세계대전사』에서 만주작전을 단 한 쪽에서만 언급했다. 존 키건의 제자로 영국의 대중역사가인 앤터니 비버(Antony Beavor) 또한 그의 저서  『제2차 세계대전 : 모든 것을 빨아들인 블랙홀의 역사』에서 만주작전을 두 쪽에서만 다루었다. 폴그레이브 맥밀런(Palgrave Macmillan)사의 아틀라스 제2차 세계대전을 번역한 책에서도 만주작전은 1쪽에서만 다룬다. 그나마 통사 서적 중에서는 영국의 오스프리(Osprey)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을 원본으로 하는 책인 『제2차 세계대전 : 탐욕의 끝, 사상 최악의 전쟁』이 비교적 분량을 할애하는 편이지만 방대한 분량에 비하면 역시 6쪽에 불과하다. 육군사관학교에서 펴낸 『세계전쟁사』에서는 만주작전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다른 통사 서적보다 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제러드 와인버그(Gerhardt Weinberg)의 저작에서도 만주작전은 1쪽에서만 간략히 언급한다.

이러한 통사류를 제외하면 만주작전을 비교적 자세하게 접할 수 있는 저작은 소련 군사사, 특히 소련군의 작전술 개념과 소련군 작전수행에 대한 권위자인 데이비드 글랜츠(David M. Glantz)가 조너선 하우스(Jonathan House)와 공저한 『독소전쟁사』이다. 소련과 독일의 격돌을 소련의 군사작전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만주작전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러시아 총참모대학의 교재였던 『러시아 연방군의 전략과 작전술』 과 영국의 소련군 연구자였던 피터 비거(Peter H. Vigor)의 『소련 전격전 이론』은 만주작전을 한국어로 소개된 문건 중 만주작전을 더욱 자세히 다루는 문건이었다. 그러다 두 저서 모두 국방대학교 안보총서로 출간된 비매품이라 일반 대중에게 소개되지 않았다. 그 결과 소련의 만주작전에 대해서 대중은 피상적인 수준에서만 접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서적과 달리 만주작전은 전문 학자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여러 번 다루어진 주제다. 한반도의 분단과 동북아 냉전체제의 기원과 맞물리는 중요한 연구 소재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의 연구들은 대체로 군사사적 관점에서 작전 자체를 다루기보다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라는 국제정치적 맥락, 한반도 분단 및 북한 정권의 탄생이라는 국내정치적 맥락에서 작전을 조명한 관계로 작전의 군사적 측면에 대한 고찰은 부족한 편이었다. 요약하면, 만주작전은 기존 선행연구에서 국내정치사와 국제정치사의 “배경”에 불과했다. 선행연구 중 『한반도 38선 분할의 역사』 가 이 중 만주작전을 가장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 사학계가 전쟁사를 다루면서도 전쟁의 부차적 측면이라 할 수 있는 전시의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는 다루지만, 전쟁사의 핵심인 군사사를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외면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만주작전을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를 둘러싼 소련과 일본의 군사적 갈등 관계의 맥락에서 조명한 연구로는 심헌용의 『소련의 대한반도 군사정책』이 있다. 불균형을 해결하려고 노력한 연구는 상명대학교 류한수 교수의 연구다. 류한수 교수는 소련군의 만주작전을 1991년의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이 수행한 “사막의 폭풍”작전과 비교하는 논문 「1945년 “8월의 폭풍”과 1991년 “사막의 폭풍”: 붉은 군대의 만주 전역과 미군의 이라크 전역의 유사성 분석」을 통하여 만주작전과 사막의 폭풍 작전의 유사성을 밝혀내었다. 그러나 언급한 연구들은 모두 전문적 학술연구로, 대중이 접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런 관계로 소련군의 만주작전에 대한 한국 대중의 인식은 전반적으로 백지 상태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 독자가 만주작전에 대해 “스토리라인”을 통해 접할 수 있던 저작은 일본의 대하소설 『불모지대』(不毛地帶)로 추정된다. 『하얀거탑』(白い巨塔)의 저자로 유명한 야마사키 도요코(山崎豊子)의 이 소설은, 일본군의 참모장교 출신으로 소련군의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이후 기업가로 성공하는 주인공을 다룬 대하소설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소설의 초반부는 주인공이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서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하며 고난을 겪는 부분이기 때문에 반공주의 정서에 익숙한 한국 독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모델은 다름 아닌 관동군 정보참모를 역임했고 전후 일본의 성공한 기업가이자 극우 인사로 일본과 한국 양쪽의 정계와 재계의 막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세지마 류조(瀬島龍三)였다. 저자는 세지마의 행적을 미화하기 위해 여러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관동군의 항복에서 비통한 감정이 끓어오르도록 묘사하고, 일본군 장교 출신인 주인공이 뛰어난 군인정신과 도덕심을 가지고 공산화된 포로의 핍박에도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는 올곧음과 기개를 가진 인물로 묘사하여 천황 숭배와 우익 내셔널리즘을 미화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 작품에서 형성된 만주작전에 대한 심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백지상태의 지적 공백을 틈타서 두 개의 음모론이 등장했다. 하나는 한국항공대 강사 이희진의 주장이었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 미국의 계획에 따라 벌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는 이희진은, 소련의 만주작전은 한반도를 분단하려는 미국의 음모에 따른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소련군이 작전에 투입했다는 150만 병력은 시베리아 철도로 그 정도의 병력을 3개월 안에 수송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과장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저자는 소련이 미국에 계속 물자지원을 요청하였고, 일본인 거류민의 증언을 바탕으로 실상 소련군은 추레한 복장에 약탈에 바빠서 군기도 빠질 대로 빠진 엉망진창의 군대였으며 작전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급하게 참전했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 때문에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이 애당초 필요가 없었지만, 미국의 대소불신과 국내정치적 역학관계가 작용해 한반도 공동 관리에서 분단으로 정책이 전환된 미국의 의도에 따라 참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음모론은 만주작전이 일본의 의도적인 한반도 분할 음모에 의한 결과였다는 주장이었다. 원래는 일본 학자 고시로 유키코(小代有希子)가 2005년에 기고한 논문에서 주장한 가설로 음모론이라기보다는 38선 분할의 과정을 설명하려는 가설에 가까웠다. 하지만 국내에 소개되며 흡사 한반도 분할이 일본의 거대한 음모로 진행되었다는 식의 음모론으로 변질되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일본 대본영은 한반도 분할과 동북아에서 미국과 소련의 충돌을 유도하기 위해 소련군의 만주침공 계획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방치하여 소련의 남하를 유도했다는 것이고, 관동군이 소련군에게 무력하게 무너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가설은 유명한 한국현대사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가 무비판적으로 저서에 인용하며 한국에 알려졌다. 이 가설은 2005년에 <시사저널>기사를 통해 음모론으로 변질되어 국내에 소개되었고, 2019년 현재에는 인터넷 매체 <딴지일보>의 창설자로 유명한 언론인 김어준이 교통방송(TBS)에서 진행하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재발굴되어 소비되고 있다.


8월의 폭풍 이전: 소련-일본 40년 관계사 (下) 8월의 폭풍

5. 대파국, 1945


이 사진을 본 청중들은 모두 장탄식을 했습니다.

소련은 대조국전쟁의 승기를 잡으면서부터 슬슬 대일전 참전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1943년에 스탈린은 처칠에게 대독전이 종결되면 특정 시기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고 언질을 넣었습니다. 1944년 5월에는 스탈린이 총참모장 바실렙스키 원수를 불러서 대일전 참전 시 극동의 모든 소련군을 지휘할 극동사령부를 창설하고 그 자리에 바실렙스키를 임명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스탈린은 바실렙스키에게 총참모부에서 만주에서 수행할 공세작전에 대한 사전조사와 예비작업을 실시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월, 얄타 회담의 합의문에서 독일이 멸망하고 3개월 후에 대일전에 참전한다고 적히며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연합국 국가들 내에서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얄타 회담

스탈린의 대일전 참전 결정은 동기는 우선 영국과 미국의 계속되는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만주국의 공업지대와 자원지대를 차지하여 전후복구에 써먹을 생각이었고, 중국 공산화의 발판이 될 기지를 마련하는 것이 스탈린의 목적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은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절대국방권은 뚫린 지 오래고 도쿄는 도쿄 핫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외교통상 관계를 유지하던 소련은 일본이 조건부 항복을 교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외교창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조건부 항복의 조건이 뭔가 하니, 천황제 유지, 군부 통치 유지,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 유지였습니다. 소련이 중재에 나서달라는 주장은 일본이 불가침조약을 준수해서 소련이 대독전에서 이긴 것이니 의리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이게 뭔 헛소린지. (청중들: ㅋㅋㅋㅋㅋㅋ) 

이리하여 일본은 대소화평공작, 즉 소련을 통해 연합국을 상대로 조건부 항복으로 전쟁을 끝낸다는 공작을 시작하였습니다. 

대소화평공작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사람은 해군 교육국장인 다카기 소키치 소장이었습니다. 계급은 소장이지만 독이일 삼국동맹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인물로 무시 못 할 영향력이 있던 인물이었던 다카기 소장은 역내 세력균형을 위해 소련을 동아시아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통해 중국 화북지대에서 소련군이 남하하면 화남지방에 상륙한 영미군과 충돌을 유도해 일본의 운신을 폭을 넓히고 미소갈등을 틈타 웅비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다카기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심지어 한반도 북부까지 소련에 넘겨주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까지 했습니다.


다카키 소치키 소장의 주장은 훗날 일본이 의도적으로 한반도 분단을 꾀했다는 음모론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다카기의 주장은 유명한 항공모함 제독이자 당대 해군 군령부차장이었던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오자와 중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군을 중국본토에서 철수하여, 이 공허의 북방지역에 소련군을, 그리고 남방에는 미국과 영국군을 침입시킨다면 이 양쪽[소련과 미국] 군대는 중국본토에서 대립하는 태세가 되어, 그 자리에 새로운 국제관계가 발전할 것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대본영 내 강경파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던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대신도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련은 전후(戰後)에서 미국과 필히 대치하게 되는 관계로 일본을 약화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상당히 여유 있는 태도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계획은 5월 11-14일에 진행된 최고전쟁지도회의 "일소교섭요령"에 반영되었습니다. 대본영은 일본의 교섭안을 소련에 타진하기 위해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를 소련에 특사로 보내고, 그 전에 히로타 고키 전 총리를 소련대사 야코프 말리크와 접촉하게 하여 특사파견에 대한 사전교섭을 진행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일소교섭요령"의 목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소련의 참전 방지
2. 소련의 중립
3. 일본과 소련이 단합하여 미국에 대항

이 목적을 위한 교섭요령은 우선 포츠머스조약과 일소기본조약을 폐지하고 아래 사항들을 소련에 양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 북사할린 반환
2. 어업권 해소
소련이 원하는 쪽으로 들어준다는 겁니다.
3. 쓰가루해협의 개방
홋카이도와 혼슈 사이의 쓰가루해협을 개방해 소련 해군의 태평양 진출의 길을 열어준다는 겁니다
4. 북만주의 모든 철도 양보
5. 내몽골(몽강자치연합정부)을 소련의 세력권으로 양보
6. 뤼순과 다렌의 소련 조차
그 외에는 만주국에 일본, 중국, 소련의 공동위원회를 만들어 소련이 합법적으로 만주국 국정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 사항들은 소련이 평소에 원하던 것들이라 소련 입장에서도 매우 구미가 당길 법한 제안이긴 했습니다. 

대소화평공작에 배경에는 일본의 대소인식 변화가 담겨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일본의 소련 인식은 소련이 4년간 불가침조약을 준수하며 긍정적으로 변했습니다.

당대 일본철학을 대표한다는 니시다 기타로는 1945년 2월 11일 “장래의 세계는 어떻게든 미국적 자본주의적이 아니고, 아무래도 소비에트적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미국체제보다 소련체제를 선호하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니시다는 불교철학자인데 이런 소리를 해요. (청중 한명: 철학자니까요. ㅋㅋㅋ)

쇼와 덴노의 측근으로 내대신인 기도 고이치 후작은 이렇게 말했어요.

 “지금 일본이 당면한 상황을 볼 때, 이제 하는 수 없다.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것이 좋다. 미국과 영국에 항복해서야 되겠는가라는 기운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결국 황군(皇軍)은 러시아의 공산주의와 손을 잡아야 할것이 아닌가 ”

천황의 내대신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해요!

심지어 대소교섭요령 작성할 대 스즈키 간타로 총리대신도 이런 말을 해요.

“스탈린 총리의 인품은 사이고 난슈(사이고 다카모리)와 같은 인물인 것 같으니 그를 중재자로 하는 게 좋겠다.”

스즈키 총리는 지옥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사과해야 해요! (청중들: ㅋㅋㅋㅋㅋㅋㅋ)


이들은 분명 루이 16세와 

니콜라이 2세의 운명을 잊어버린 게 분명합니다! (청중들: ㅋㅋㅋㅋㅋㅋ)

그러나 스탈린은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얘네들이 내게 이러고 싶다는데?”라면서 일본의 교섭제안을 미국, 영국과 공유했습니다. 일본의 교섭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하나도 없으니 안심하라는 겁니다.

게다가 스탈린은 일본의 희망을 전략적 기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스탈린은 말리크에게 일본의 교섭안에 응할지 말지 애매한 태도만 취하라고 지시하며 대본영의 희망사항을 부풀리고는, 소일 불가침조약의 유효기한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대본영을 더더욱 애태우게 만들었습니다. 스탈린이 일본을 희망고문한 겁니다.


또한, 스탈린의 모호한 태도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루스벨트와 달리 소련을 불신하는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스탈린은 의도적으로 일본과 교섭할지 말지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아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싫지만, 소련이 일본에 접근하는 것은 더 싫었던 트루먼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막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소련군의 작전 준비는 착착 갖춰지고 있었습니다. 150만 대군과 수천 대의 기갑차량과 전투기, 화포가 소만 국경에 집결했습니다. 소련군은 특유의 기만술로 병력배치 규모를 숨겼습니다. 대본영과 관동군 사령부는 소련군의 정교한 기만에 속아서 국경에 소련군 45개 사단만 배치되어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대본영은 소련군이 60개 사단이 이상이 되어야 침공할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있었지만, 실은 90개 사단 이상이 집결된 상태였습니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거부하자 1945년 8월 8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일본이 미국에 먼저 항복할지도 몰라서 마음이 급해진 스탈린은 예정시간보다 일찍 공세를 지시했습니다. 8월 9일 자정,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의 대대적인 침공이 개시되었습니다. 

망했어요

이에 대본영의 첫 반응은 “그럴 리가 없다.”였습니다. 대본영은 8월 9일 당일까지도 여전히 소련을 통한 강화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겁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대본영은 소련군의 침공 규모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명령서에 쓴 데다가, 관동군에 내린 지시는 공격해 오는 소련군에 대한 반격이 아닌, 공격을 준비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이 덕분에 소련군은 작전목표를 계속 초과달성하며 50만 관동군과 25만 만주국군을 거대한 포위망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희망을 소련이 뭉개버렸다는 사실은 도무지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련의 침공에 나가사키 원폭 투하까지 겹치자 주요 각료들은 결국 무조건 항복의 수용으로 가닥을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세가와 쓰요시 박사는 소련침공의 충격이 원폭투하보다 더 강한 충격을 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 무조건 항복이 사실상 논의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소련의 침공은 엄청난 것이었다는 것이 하세가와 박사의 주장이었습니다. 하세가와 박사는 원폭이 추가로 투하되었더라도 소련이 참전하지 않으면 일본은 계속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원폭이 투하되지 않아도 소련이 참전했다면 일본은 항복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6. 결론

전후 일본은 소련에 강한 피해자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청중들 짜증스런 목소리) 4년 동안 불가침조약을 준수해 소련을 도와주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얘네가 할 말입니까? (청중들: ㅋㅋㅋㅋ)

30년대에 소련이 보여준 유화 제스쳐를 다 기만이라고 무a시하고 반공주의와 러시아혐오증에 집착해 무력과 북진만이 답이라고 떠들었던 일본입니다. 30년대의 폭주와 대소도발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고바야시 모토후미 만화를 비롯한 일본 밀리터리 만화에서 멋지구리한 나치 독일군이 무능하고 추레한 소련군을 일방적으로 박살 내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은 이런 피해자 의식으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북진을 꿈꾸는 군붕이들은 관동군의 말로를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질문 1: 만주국군이 25만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규모가 불어났나요?
답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 2: 소련이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서 계속 병력을 수송하는데 일본이 그걸 아예 몰랐나요?
답변: 실제 정보수집은 잘했는데, 정보 해석을 이상하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후기: 사실 참피드립을 계속 치고 싶었는데, 사전에 참피를 불편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에 쓰지 않았습니다.


8월의 폭풍 이전: 소련-일본 40년 관계사 (中) 8월의 폭풍

3. 본격적인 소일 충돌, 1931-1939


관동군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전체를 장악하고 괴뢰국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천군벌보다 훨씬 확실한 완충지대인 만주국을 만들고, “가지지 못한 나라” 일본을 “가진 나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자원지대를 손에 넣었습니다. 이는 일제 15년 폭주의 시작이었습니다.



봉천에 입성하는 일본군




그런데 소련은 여기에 유화책으로 대응했습니다. 흔히들 스탈린을 세계적화에 광분하는 독재자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세계혁명의 배신자라고 욕을 할 정도로 현행 국제질서의 유지를 중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스탈린 외교의 특징인 서방 강대국과의 정면충돌은 최대한 피한다는 기조는 일본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국제연맹의 여러 국가들이 만주국을 불승인했지만, 소련은 만주국을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승인하지도 않았습니다. de fecto, 즉 사실상 국가로 인정을 해 버리고 문제를 방치한 거죠. 그리고 1935년에는 문제의 중동로 철도를 일본에 매각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때문에 장제스가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하는데 스탈린은 알 바가 아니었죠. 최신 연구에 의하면 중동로 철도 매각이 그저 일본이 하도 남만주에 철도를 많이 건설하다 보니 사업성이 떨어져서 매각한 거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일유화책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37년의 고려인 대이주도 연해주에서 일본과의 충돌요소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대일 유화책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동군과 일본 정부는 소련의 유화책을 아예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소련이 관동군의 무력증강에 대비하여 극동 국경에 병력을 증강하는 것만 부각하며 소련의 유화적인 신호는 전부 기만에 불과하니 무력증강만이 답이라고 주장하며 관동군 세력확대의 기반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수십 번의 소규모 국경침범을 하며 소련을 계속 도발하였습니다.


게다가 1936년, 일본은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방공협정을 맺어 버립니다. 일본 내 파시즘에 대한 우호적 시선과 히틀러가 떠드는 “유대-볼셰비즘 절멸”에 강한 매혹을 느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공협정을 통해 일본은 대소적대시정책을 사실상 노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대환장 콜라보



중일전쟁도 긴장된 소일관계를 반영하였습니다. 노구교 사건이 터졌을 때, 일본 군부는 중국의 배후에 소련이 있으며 노구교 사건은 소련의 사주로 발생한 일이라도 단정지었습니다. 그런데 진상조사를 해 보니 소련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게 드러났지요. 하지만 중국 화북지방을 선제적으로 점령하여 더 거대한 완충지대를 만들어 소련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견해가 더욱 부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화가 난 데다가 중화민국이 무너지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소련이 Z작전을 통해 중화민국에 군수물자와 군사고문단, 전투기 조종사를 파견해 지원하자 일본은 이를 맹비난하고 중국 뒤에 소련이 있음이 확실하다고 보며 긴장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긴장격화 와중에 결국 소련과 일본은 대규모 무력충돌을 벌이게 되는데 1938년의 하산 호수 전투가 그랬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의 극동지구위원장인 류시코프란 놈이 숙청을 피해 국경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고위급 인사가 도망갔으니 자연히 소련이 소만 및 한소 국경지대를 강화하며 소련군과 일본군의 대치 수위가 한층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하산 호수 인근 장고봉에 1개 분대 규모의 소련군이 소규모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여기가 함경도 국경지대였기 때문에 담당 관할인 조선군 사령부는 별거 아니니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대본영에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관동군이 갑자기 끼어들었습니다. 관동군은 장고봉 일대가 자기네들 관할구역도 아닌데도 이번 기회에 소련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며 무력대응을 주장했습니다. 대본영은 관동군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일본군이 몰려오니 결국 서로 왜 국경침범 하냐고 아웅다웅하다 총격전이 벌어지고, 일본군이 장고봉을 점령하며 사태는 결국 사단급 수준의 대규모 충돌로 확대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산 호 전투는 결국 계속되는 긴장격화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긴 영국의 중재로 결국 일본이 먼저 물러나며 소련이 다시 장고봉을 가져가는 쪽으로 종결되었습니다.




하산 호 전투 지도



그런데 일본군은 이 전투를 계기로 소련군을 더욱 얕잡아보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소련군의 세 차례에 이르는 공세를 막아냈습니다. 게다가 이 전투에서 보여준 소련군의 모습은 흔히 서구 세계에서 소련군에 가진 편견인, 인명을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적 진지에 인해전술로만 몰아붙이는 무식한 군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분쟁이 종결될 때까지 소련군은 장고봉을 탈환하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간과한 사실은, 소련군이 한 번만 더 장고봉을 공격했다면 장고봉을 뺏길 수 있을 거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관동군은 그 점은 무시하고 더 큰 도발을 1939년에 감행하고 말았습니다.


만주와 몽골의 국경은 소련과 일본의 분쟁지대였습니다. 일본이 국경을 할흐 강으로 규정하자고 한 반면, 소련은 할흐 강보다 더 동쪽으로 30km 떨어진 노몬한 마을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양측이 계속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몽골 기병대가 분쟁지역에 진입했습니다. 몽골 기병대는 인근에 진입한 만주국군 기병대와 산발적 충돌을 벌였고, 몽골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일본 수색대가 분쟁지역에 진입하여 몽골군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이 수색대는 소련군과 몽골군에 포위당해 섬멸당해 버리며 사태가 악화되었습니다. 관동군 사령부는 더 강력한 무력대응을 결정하며 2개 사단을 투입해 공세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관동군의 공세는 소련군에게 막혔고, 1939년 8월에 이르면 결국 주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에게 2개 사단의 대부분이 포위당해 버리는 참패를 겪게 됩니다.



지도를 보면 2개 사단이 포위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투에서 무참히 패했고 소련군의 강력함을 보았지만, 당시의 히라누마 기이치로 내각과 관동군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압박하여 할힌골 전투의 승패와 관계없이 일본을 도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된 겁니다.



스탈린은 이 협정을 맺으며 "오늘부터 나도 반공주의자요."라는 개드립을 쳤습니다;;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을 거라고 일본에 알려주지도 않았고 암시도 주지 않았으며, 일본 외무성과 정보기관들은 불가침조약 움직임을 아예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독일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된 겁니다.


히라누마 수상은 이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구주천지 복잡기괴”

(청중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즉, 유럽 정세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볼셰비즘 절멸한다는 나치가 소련과 협정을 맺어요!


결국 도고 시게노리 주소 일본대사를 대표로 한 일본 대표단은 소련에 내내 저자세로 나와서 소련측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결국 일본은 소련이 주장하는 데로 국경선을 확정지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소련도 일본의 체면을 살려주느라고, 중화민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최소화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째 소련과 일본의 관계에서 중화민국은 항상 피해자예요. (청중들: ㅋㅋㅋㅋㅋㅋ)


이후 일본에서는 육군 내부에서 이제 독이일소 사국동맹 시대를 대비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나치 독일이 부르짓던 “유대-볼셰비즘 절멸”은 그런 건 그저 내부결집을 위한 레토릭에 불구하고 독일과 소련의 관계도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 그냥 현실 국가관계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유대-볼셰비즘 절멸하자는 나치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어 버리니 그럴 수 밖에요. 그 때문에 추후 소련과 재차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나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일본은 남방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4. 기묘한 중립, 1941-1945


1941년이 되자 소련은 나치 독일이 예상 못한 전유럽 석권에 성공하며 나치와의 전쟁이 훗날이라도 불가피함을 느꼈습니다. 프랑스가 그렇게 빨리 무너질 줄은 소련도 몰랐던 겁니다. 그에 따라 소련은 후방인 극동의 안전을 도모하고 싶어 했습니다. 일본 또한 남방으로 눈을 돌리며 영국과 미국과의 갈등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역시 후방인 극동의 안전을 도모하고 싶었습니다. 그에 따라 소련과 일본은 서로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이 4월에 모스크바로 날아가서 스탈린과 불가침조약 협정을 치릅니다. 불가침조약의 핵심 문구는 조약 당사국은 제3국이 서로의 나라를 침공할 시 중립을 준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불가침조약 협정에 서명하는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



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마쓰오카 외상이 스탈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일본인은 사실 도의적 공산주의자입니다.”

(청중들: ???????)


이는 일본의 천황제 집단주의와 소련의 스탈린주의 집단주의가 일맥상통한는 것이 있다는 견해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청중들: 아. ㅋㅋㅋㅋ)


그 말에 스탈린은 이렇게 회답했다고 합니다.


“나도 당신도 다 같은 아시아인이오.”

(청중들: 아 조지아 ㅋㅋㅋㅋㅋ)


그렇습니다. 이는 스탈린의 출신이 그루지야인 데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당대 그루지야를 비롯한 캅카스 지방은 서유럽 세계에서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협정 끝내고 팔짱 끼고 기념촬영



그런데 6월 22일, 나치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습니다. 나치 독일은 침공 전부터 일본에 대소전이 시작되면 소련을 공격하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일본은 이 때문에 나치가 대체 뭐하자는 건지 몰라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아무튼 독일이 소련과 전쟁한다고 하니 다시 소련과 싸우자는 북진론이 육군에서 대두되었습니다. 관동군은 12개 사단을 동원한 “관동군 특종연습”이란 대규모 기동훈련을 개시하여 다시 긴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독일에 대한 불신이 이미 강해졌습니다. "유대 볼셰비즘 절멸"을 내세운 독일을 믿고 소련을 침공했다가 독소 불가침조약처럼 히틀러가 원하는 것만 얻고 전쟁에서 빠지면 버리면 일본은 그냥 바보가 되어 버릴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소련이 독일을 상대로 1년 이상 버틸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일본 정부는 결국 불가침조약의 준수를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흔히들 유명한 소련 스파이인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이 불가침조약을 준수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스탈린이 극동 병력을 모스크바 전투에 투입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런데 글랜츠 박사님의 2017년에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그게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은 조르게 보고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극동에서 병력이동을 결정했던 겁니다. 조르게의 보고는 스탈린을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었지만, 스탈린은 조르게 보고 전부터 일본이 침공하더라도 모스크바를 잃느니 연해주를 잃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소련과 일본은 상대는 분명 아군의 적인데 자신의 적은 아닌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양측은 불가침조약을 철저히 준수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였나면, 일본은 소련 블라디보스톡으로 물자를 수송하던 미국 수송선을 격침했을 때 소련의 항의를 받자 다시는 극동항로만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관동군과 극동 소련군 모두 서로 도발을 극도로 자제했습니다. 한 미국 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기묘한 중립”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과 일본은 내내 서로를 답답하게 여겼습니다. 나치 독일은 일본에 소련을 공격해 달라고 계속 부탁했지만, 일본은 독일에 유대 볼셰비즘은 어차피 레토릭이고 땅 뜯으면 전쟁 끝낼 거 다 아니 그냥 영미와 더 싸워달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독일과 1943년 하리코프 전투 이후에는 독일과 소련 사이를 중재하려고까지 해서 독일을 짜증 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간극은 독일이 망할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청중 한명: 목표가 일치하지 않는 조별과제 ㅋㅋㅋㅋ)


한편 미국도 여러 차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요청했는데 소련은 내 코가 석자라며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실제 첫 참전 요청이 1941년 12월이었는데 이때는 소련이 모스크바가 간당간당한 상황이어서 대일전 참전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아무튼 소련은 대일전에 때 되면 참전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미국도 소련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으니 일본과 독일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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